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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남수 Dec 16. 2020

소통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간절함

파스칼키냐르 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감상 


 엄혹했던 군부독재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신 새벽 뒷골목에서’ 숨죽여 외친 언어, ‘민주주의 만세!’를 그때의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절박하면서도 내뱉지 못한 언어들. 콜브륀의 남편 죈느가 우여곡절 끝에 쟁취하게 되는 한마디 해방선언처럼 넘어지고 깨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외쳐야만 하는,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채, 적절히 기회주의적으로 적절히 인기발언만 하면서 많은 말을 혀끝에 두고 만다.    

 

 파스칼 키냐르는 언어학자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음악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여러 언어를 습득하고 여러 음악을 익히며 자랐다. 음악 또한 악기를 통한 소통, 즉 언어의 다른 방식이라 할 것이다. 각국의 다양한 언어를 익히며 혼란을 느낀 그는 언어습득을 거부하는 등 자폐증상을 앓았다고 한다. (본 책 뒤의 해설참조)

언어의 범람 속에서 언어를 거부하던 그가 쓴 첫 작품이 [말 더듬는 존재]였고 이 작품의 이야기 전개도 ‘말더듬이 왕 루이의 죽음 후 카를로망이 왕위에 오른 후’로 열고 있다.      


 실 짓는 처녀 콜브륀이 재봉사 죈느에게 반하여 사랑을 고백하자 죈느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벨트를 만들어달라는 조건을 건다. 그녀는 사랑을 얻기 위해 매일 반 벨트를 만들고자 애쓰지만 쉽지 않다. 절망하여 울고 있던 어느 밤, 우연히 영주가 나타나고 영주는 콜브릔에게 길 안내를 받고 사과한 쪽을 얻는다. 그 보답으로 영주는 자신의 이름 아이드비크 드 엘을 기억해달라며 똑 같은 벨트장식을 건네주었고 콜브린은 죈느와 결혼 할 수 있게 된다. 행복한 날들이 흐르던 어느 날 콜브륀은 영주와의 약속을 떠올렸으나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혀끝에서만 맴도는 이름. 

 콜브릔이 여위어 가는 이유를 알게 된 남편 죈느는 아내가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 나선다. 남편의 도움으로 드디어 죈느는 긴 고통에서 벗어나는 언어를 내뱉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드비크 드 엘!     


 언어, 이름, 벨트, 작가가 말하려고 한 중심 키워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읽혔다. 사랑을 획득하기 위한 매개물로 벨트를 선택한 것은 속박 또는 집착과 욕망을 말하려는 것 같다. ‘영주’를 통한 임시방편적 해결은 긴 고통을 안기고 망각하지 않아야 할 이름을 잊어버린 콜브륀의 고통은 죈느가 해결한다. 작가는 왜 이름을 기억하게 했을까? 그것도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열쇠를 지닌 기득권자의 이름을…….

 까닭은 ‘루이 2세후 카를로망이 지배했다’는 시대적 상황을 의미하는 듯하다. ‘당시는 농촌이나 항구 어디에도 글을 쓸 줄 아는 이가 없었고’ ‘매일 매 분이 세상의 종말’인 혼란기였다. 봉건권력인 영주를 극복해야 했다. 일상의 나태함과 무관심에 지배당할 때 어느새 속박의 굴레가 덮친다는 것. 기억해야 할 이름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이 책에서 영주의 이름은 죈느와 콜브륀으로 상징되는 민중들에게는 두려운 이름이었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 5공 청문회 때 어떤 국회의원이 전두환을 향해 ‘살인마!’ 라고 외쳤을 때 티브이를 보며 체증이 트이는 것 같았다. 때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 와서 꽃이 되는’ 이름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를 불러낼 때 어두운 실체를 드러내는 이름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때때로 공허하다. 생각과 달리 빗나가고 속에는 가득한데 정작 나오는 것은 한 조각밖에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달변이어도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양날의 칼’처럼 내뱉는 순간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언어, 세상과 악수하는 언어가 얼마나 될까. 대선이 끝나는 순간, 인수위원장은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하며 ‘오렌지를 오륀지로 발음해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짧은 리포트에 담을 많지 않은 언어와 씨름하고 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입맛대로 해석하는 독서를 하는 동안 소리쳐도 입이 열리지 않는 꿈속처럼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소통되지 않는 것의 답답함과 말해야 하는 것의 간절함이 목을 뚫고 나왔으면 좋겠다. 

 아이드비크 드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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