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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남수 Dec 21. 2020

'정상성' 비틀기?

-독서의 맛-

 어미배속에서부터 하나님의 규례대로 흠 없이 자란 순덕은 성경으로 글자를 배우고 회당을 놀이터로 하여 ‘성령’을 키운다. 아비는 교회버스를 운전하고 어미는 사찰집사를 맡았으니 집안이 통째로 성령덩어리다. 이기호작가의 <최 순덕 성령충만기>에서 어린순덕은 어미에게 묻는다.

 “어머니시여 그럼 제 아무리 착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나이까? 세종대왕도 이순신장군도도 지옥으로 갔나이까?”  

 순덕의 어머니는 목소리 높여 가로되,

 “그러하도다. 믿음 없는 자들은 다 유황지옥에 떨어질 지어다”   

   

 순덕어미의 단언은 순덕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순덕은 유황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가득 지닌 채 기도에만 애쓴다. 생활은 통째로 기도와 전도고 성적은 바닥이다. 순덕을 염려하는 담임선생에게 어미는 한술 더 떠 교회주보를 내밀어 전도하는 것으로 상담을 끝내버린다.

 그렇게 자란 순덕은 ‘자신의 본업은 하나님 사업이니 지상에서의 학과는 그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지상의 잣대로 판단치 말 것’을 주장한다. 일하는 커피숍에서 주인만 없으면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틀어대다가 쫓겨나면서 세상의 몰이해를 안타까워한다. 자신은 박해받는 순교자다.     


 어느 날 순덕은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하나님의 따로 쓰심’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쓰일’ 자리를 찾던 어느 날 아담의 변태적 행위를 목격하게 되었다. 순덕은 아담의 ‘죄’를 전도를 통해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쓰임’이라고 확신한다. 구원 작전에 돌입하여 아담에 집착한 순덕의 노력은 드디어 아담을 교회로 이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가족을 두고 떠돌던 아담을 위해 동거를 시작한다. 쓰임을 완수했다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간증은 매번 교인들을 감동시키고 아담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멘, 아멘 화답한다.     


 소설은 인간이 지니는 두려움의 실체를 해학적으로 조롱하는 느낌도 든다. 순덕의 구원에 대한 집착은 ‘죽어서 유황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두려움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각인된 의식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유황지옥’을 검색해보았다. 누군가의 블로그에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유황지옥은 불 못 보다 더 뜨거운 고통의 장소입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아이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심으면서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덕의 어머니는 모든 가치를 교회 안에 두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입되거나 형성되어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가치들이 많은 측면 허상이라고 빙긋 웃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구약성경을 읽어 내려가는 식의 문장형식을 띈 것도 작가의 기발한 전략이다. 순덕이 찾아 헤매던 ‘쓸모’의 실천대상을 하필이면 도둑도 사기꾼도 아닌 변태남자 아담으로 설정한 것도 재미있다. 아담은 창세기 최초의 인간형상으로 이브를 위해 금단의 열매를 제공한 원죄를 지닌 인물 아닌가? 같은 이름의 아담은 ‘정상’ 에서의 일탈 행위자다. 아담은 자신의 벗은 몸으로 사람들을 막아설 때 더 당당하다. 단정한 모습으로 ‘대로변 밝은 네온사인에 비친 아담의 얼굴’은 오히려 허약하고 왜소하다.      


 판소리사설처럼 따라가다 보면 키득키득 웃음이 난다. 대개 종교적 모티브를 가지고 시작하는 소설들은 죄, 업보, 죽음 등 어둡고 우울한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절망도 희망도 아니면서 불쾌하거나 딱히 경쾌하지도 않은 여운을 남긴다.



신작 <빼앗긴 일터, 그 후>를 출간했습니다. 

 https://bit.ly/aladinnamso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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