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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남수 Dec 23. 2020

‘마른 꽃’들의 존엄

독서-  <마른 꽃> <복덕방> < 마지막 테우리>


[마른 꽃](박완서)의 화자인 ‘나’는 ‘나이같은 건 잊어버린 채 스무 살의 청춘들처럼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밤공기를 염려해 걸쳐주는 그의 코트 안에 몸을 옹숭’거리기도 하는 여자다. 그러나 총명하고 깔끔한 ‘나’의 딸과 ‘그’의 며느리가 두 사람의 로맨스를 알게 되고 제도적 틀로 결합시키려하자 결별을 선택한다. ‘젊은 시절의 연애는 정열을 넘어 정욕이 있고 그래서 앞뒤 상황을 살피고 따지고 할 겨를이 없지만’ 육십이 넘어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 모든 것이 너무 빤히 보인다. 이를테면 같이 생활할 때 나타날 온갖 잡다한 인간의 속성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아이 만들고 낳아 기르고 짐승 같은 시간들을 같이 한 사이여야 가능하다고.

 겉멋부리는 사랑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젊은 딸과 며느리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자신들의 ‘불편한 짐’ 을 덜고 싶은 계산임도 너무 잘 보인다. 

 청남 색 아콰마린처럼 상큼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박완서의 작품은 읽는 맛이 개운하다. 한편 밑바닥 감추고 싶은 허위의식이 드러나는 부끄러움도 같이 온다.     

      


 

[복덕방] (이태준)의 안 초시는 한때 목에 힘깨나 주며 살던 시절이 있었지만 세상은 변했고 몰락한 늙은이가 되었다. 지금은 안경테 하나도 바꿀 형편이 못되어 딸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다. 동네의 서 참의 복덕방에서 잠도 얻어 자고 술잔이나 얻어먹으며 지내자니 수시로 자존심이 상한다.  

    

 서 참의는 한때는 무관으로 ‘한번 호령하면 산천이라도 물러설 것 같은’ 기개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갖 하찮은 인간들이(그의 눈에) 사글세방 한 칸을 얻어 달라고 와도 녜-녜 -하고 따라나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 다행히 안 초시의 꼴이나, 자기보다 뛰어났던 김 참의가 가마니나 신문잡지 팔거-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며 위안한다.    

  

 별로 성미가 맞지 않아 투덕거리는 안초시와 서참의 사이를 사전을 끼고 삼국지 읽듯 하는 대서업자 박희완영감이 적절히 조절하고 매개한다. 그렇게 세 사람은 복덕방을 중심으로 콩닥콩닥 살아간다.     


 안초시는 과거의 풍요를 잊지 못하고 호시탐탐 재기의 꿈을 꾼다. 재물을 맛보았던 과거를 잊지 못할 뿐 아니라 바뀐 세상과 자신의 처지에 적응 못하니 딸에게도 외면당한다. ‘재물이란 친자간의 의리도 배추 밑도리듯 하는가’ 한탄하던 그는 헛된 꿈으로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시방석이던 터에 딸 볼 염치가 없어진 자존심 강한 노인은 살아갈 힘을 잃고 만다.  

   

 지금은 부동산중개소라 부르지만 70-80년까지는 복덕방이었다. 노인들이 모여서 화투 바둑 장기판을 놓고 종일 잡담 나누다 손님 오면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작품속 안 초시처럼 노여움타서 삐치는 사람이 반드시 있고 소주 한 병 놓고 달래면 못이기는 척 풀었다가 또 삐치기도 하며 투덕투덕 정을 이어가는 어른들의 사교장이며 사랑방이었다.


 이 작품은 70년 전이 배경이라 허드렛물 버린 수채를 통해 옆집에서 무슨 음식을 해먹었는지도 알 수 있던 시대다. 세 노인들의 개성과 미묘한 기 싸움들도 들여다보듯 선명하고 평소에는 투덕거려도 어려울 때 마음을 모으는 인간미가 콧등을 찡하게도 한다. 안 초시의 장례식장을 뒤로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걸어가는 두 노인과 끝내 못 바꾸고 세상 떠난 안 초시의 안경테가 쓸쓸하다.     

     



  [마지막 테우리](현기영)는 한 장의 풍경화 같다. 고즈넉한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들 사이에 서있는 자그마한 노인이 보인다. 노인은 제주 4.3항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지니고 산다. ‘사태’ 때 이미 자신도 죽은 바 진배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행복도 인간도 믿지 않는다. 현재는 그저 ‘가공의 삶’일 뿐이다. 


 그때, 주민들은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백여 마을이 소각되고 켜켜이 죽어간 사람들과 함께 마소들도 죽었다. 초토화된 땅의 방치되었던 초원에서 그는 테우리가 되었다. 하늬바람이 불어 땅속이 말라가고 밤공기가 차가워지는 밤 ‘잔등에 흰서리를 인’ 소들이 불안한 발굽을 울리면 노인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자식 같은 존재인’ 소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도둑에게 끌려간 소를 찾기 위해 뒤쫓다가 다수의 도둑을 상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되찾아오는 노인의 연륜과 지혜는 무릎을 치게 한다


 노인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청년은 어두운 시대의 상처로 얽혀있어 볼 때 마다 죄책감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청년에게 소 예기를 할 때는 모르는 것 없이 신나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소는 애지중지하는 자식 같다.

하지만 소를 돌보고 지키며 수백 마리의 소떼들이 풀을 뜯던 초원이 포크레인이 등장한다. 과거에 피로 덮였던 초지가 이제 개발의 광풍에 갈아엎어진다. 노인은 초원이 ‘생피를 벌겋게 드러낸’ 순간까지도 테우리의 존엄을 지킨다.


 강풍이 불던 어느 날 소들이 사라지고 ‘검은 구름에 해도 침범’ 된 밤 소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노인은 밤이 되어 마른소똥으로 불을 피워 눕는다. 그 잠결에 테우리 친구 현태문의 음성을 듣는다. “어이, 순만이” 노인은 소리에 의해 소 발자국들을 찾게 되고 마을을 찾는다. 마을에 도착하니 그를 부른 친구 현태문은 임종이었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초원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을 통해 작가는 제주의 삶을 나직하게 들려준다. 갈아엎어지는 초원도 현태문의 죽음을 예감하듯 숲을 내려간 소들도 하나로 어우러진 소리고 풍경이다.    

 


 나이가 들수록 단정하고 깊어지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듬는 ‘나’도, 더 이상 추해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택한 안 초시도, 생을 다해 소를 돌보는 테우리 노인도, 존엄한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한다.    



  신작 <빼앗긴 일터, 그 후> 출간, 관심 있는 분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bit.ly/aladinnamso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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