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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남수 Dec 25. 2020

인상

    코로나사태로 힘들어진 요즘 동생과 통화하며 여러 해 전 세상 떠난 엄마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지금 계셨으면 훨씬 힘 드셨겠다, 그땐 병실이 비지 않도록 우리 형제들이 번갈아 엄마 옆을 지켰고 친척들도 많이 찾았다. 담당의사의 허락을 받아 근처의 맛 집에서 엄마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어쩔 뻔 했는가, 떠나신 건 애석하지만 올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당시 병실에서는 우리 형제들이 지금도 가끔 웃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인실에 있던 엄마가 5인실로 옮긴 날이다.

 간호하던 언니가 막 침대 시트를 다독여 엄마를 뉘어드리고 숨도 돌리지 않았는데 옆 침상의 할머니 한 분이 한껏 다듬은 목소리로 언니를 불렀다.

 “거기, 오늘 들어오신 부~우~ㄴ, 이리 좀 와 보세요.

 언니가 무슨 일인가 하여, “아, 예” 하며 그쪽 침상으로 다가갔다. 마치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언니를 옆에 세운 그분이 말했다.

 “여기는 병실이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예, 저희가 형제들이 많아서”

 언니가 얼결에 미안한 내색을 하자, 이분은 정색을 했다. 

 “아니, 방문객은 나도 많은데 목소리를 좀 조용히 해 달라는 거예요.” 

 방문객 숫자를 언급한 언니를 나무라는 할머니를 보며 무색해진 우리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우리에게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70세 후반이라지만 ‘할머니’라 부르면 펄쩍 뛰며 그렇게 부른 사람을 침상 옆으로 불러 “나 할머니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단호히 훈계했다. 그러나 타인의 ‘소음’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 분은 정작 자신의 음성은 절제하지 않았다. 대개 병실에 사람이 많을 때 또렷하고도 큰 소리로 “헬로” “야(Yes)", 등의 단음 영어를 쓰며 수차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면 간병인을 옆에 앉힌다.

 “아줌마, 제가 누구하고 통화한 줄 아세요?”  

 간병인은 눈을 창밖으로 둔 채 묵묵히 듣는다. 지금 통화한 사람은 무슨 박사, 좀 전의 통화는 무슨 교수, 무슨 목사, 궁금할 이유가 없을 간병인에게 끝없이 자신의 관련자들이 매우 유명한 지성인들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이의 소음을 관리해 놓고 병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한다는 것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기에 병실 사람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의 재산이 엄청나다며, 미국에 돌아가면 이 병원을 사겠다고 했다. 회진하는 의사들을 세워놓고 이름을 확인한 후 수첩에 적는 통에 의사들이 황당해하자 퇴원하면 미국 가서 담당 의사를 초대하겠다고 했다.

 어느 날은 간병인에게, “아줌마, 실은 제가 전화를 하면 문병 올 사람이 이천오백 명쯤 돼요.”라는 바람에 내 남동생은 “아이쿠, 이거 큰일 났다, 이천오백 명오면 당장 승강기 미어터질 테고 이 병동 업무 마비될 텐데 엄마 당장 병실 빼야겠다.”고 익살을 떨어 우리는 입을 막고 배를 쥐었다.

 동생에 의하면 언젠가는 아침 일찍 전화를 들고 20여 분 통화하다가 “응 바꿔 봐” 하더니 “Bass, go bed room.” 여전히 짧은 단문의 영어로 뭐라 뭐라 통화를 하다 끊은 후 또 간병인에게 묻더라고 했다.

 “아줌마, 제가 지금 누구하고 통화한 줄 아세요?”  

 일일이 답변하기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데도 간병인은 잘 대꾸해 주더란다.

 “글쎄, 누구세요?”

 답변이 단연 압권이었다.

 “제가 키우는 강아지예요.”

 동생은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며 키득댔다.     


 엄마의 수술 날에 맞춰 입국한 미국 시민권자 언니와, 외국계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동생은 끊임없이 거북한 통화를 들으며 매일 요절복통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는 그가 링거 줄 들고 복도를 걸을 때 보면 기저귀를 찬 엉덩이가 오리 궁둥이처럼 볼록 나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전화도 상대방 없이 혼자 떠들었을 수도 있다고 병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렇게 ‘큰 부자’에 ‘대인관계’도 넓고 자신의 직업이 ‘목사’라는 분이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에서 온 듯해 보이는 세 사람이 딱 한 번 다녀간 것이 전부라고들 비아냥댔다. 오늘 퇴원한다, 내일 퇴원한다, 계속 미루는 본새가 입원비 처리도 안 되는 듯했다. 간병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화가 치민 간병인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모양이니 면회 오는 사람 하나 없지.” 악담을 퍼붓고 갔다.      


 새로 온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그분이 퇴원하는 날이었다. 간병인에게, 딸이 차를 가지고 올 거니까 짐 좀 내려 달라 해서 마무리해주었는데 끝내 간병비용을 안 주는 바람에 이 간병인도 화가 나서 어딘가로 따지러 가는 둥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 간병인이 마침 로비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말했다. 

 “그 할머니요, 딸이 오기는커녕, 혼자 택시 타고 가던데요.”      

 그동안 제 몸도 힘든 터이니 시비하기 싫어서 모른 척 있던 병실 사람들은, 다른 건 다 두고라도 그렇게 고생시킨 간병인 돈 떼먹는 것을 보면 ‘나쁜 할마시’라고 뒤 꼭지에 욕을 퍼부었다. 더하여 ‘겨우 병원비만 냈을 거다.’는 추측과, ‘그 할미는 돈이 있어도 병원비는 몰라도 떼먹을 수 있는 한 기어코 떼먹을 부류’라는 둥, 뒷말이 분주했다. 입원실의 한때, 때로는 분개하고 때로는 요절복통했다.  

   

 노년의 인상은 그 사람의 인생을 담는다고 한다. 공허한 허세로 조급해 보였던 그 할머니 얼굴은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같았다. 한편으로는 아파 누워있을지언정 배려와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는 병실의 다른 이들보다 더 초라하고 아픈 환자 같아 짠하기도 했다. 상식의 범주를 넘는 소란을 남기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병실은 상식을 찾았지만 심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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