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발전과 사회관계의 본질을 떠올리며
'인간은 사회적 동물(zoon politikon)'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말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결국 관계없이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의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공동체)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적 동물'이라는 접근방법에 대해 최근 이런저런 생각들과 연계해서 정리해봅니다.
책 '행복의 기원_서은국'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큰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 내용이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책에서 인간의 뇌는 무엇을 위해 설계가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있어 옮겨봅니다.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Michael Gazzaniga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뇌과학자로 꼽힌다. 최근 그는 자신의 책에서 큰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Gazzaniga, 2008)
책 '사피엔스'를 쓴 유발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는 것이고,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고 책에서 주장을 합니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하기에,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협동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했으며,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통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이 뒷담화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의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죠..
과학적 연구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고 합니다.(책 '사피엔스_유발하라리'에서 발췌)
이처럼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만들어 가던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이러한 '사회'라는 틀은 매우 중요했으며, 이 틀을 유지하고 확장되면서 많은 지켜야 할 규약이 생기고, 이런 규약들이 인간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말이 참 대단한 식견이란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어렵게 구해서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모임을 예술로 만드는 법_프리야 파커'인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서 '모임'에 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족모임, 친척모임, 결혼식, 장례식, 학회모임, 토론회, 발표회 등등. 더 나아가 전시회, 공연, 업무회의, 축제.... 많은 것들이 '모임'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모임' 들이 우리에게 마냥 즐거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부부동반 모임에 참여하고 부부싸움을 하는 커플들이라든지 원치 않는 회식모임에서의 무리한 음주라든지, 각종 지역, 학연이 연결된 모임 속에서 사건 사고들도 많이 접하죠. 우리 생활의 일부인 '모임'을 어떻게 설계하고 참여해야 하는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하고 이에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모임'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회적 소속감과 관계를 만들어주기에 온오프라인의 논쟁(온라인 성장으로 인한 오프라인 공간의 감소문제)에서 결국 '모임'의 물리적 공간이 되는 오프라인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봅니다. 그 이유가 "사회적 관계를 위한 공간의 필요"라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우리가 식당을 찾아가는 것은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서서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기 위한 이유가 크기 때문이죠.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오프라인 상점들은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으로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최근 인공지능이 아주 뜨겁습니다. Chat_GPT가 쏘아 올린 화두가 전 세계를 흥분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연일 인공지능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활용방법에 대한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주목해서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미국 교육계에서는 학생들의 창의력과 비판능력에 저해가 된다고 인공지능 금지령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과학 학술지에서는 인공지능을 논문 저자로 인정 안 하겠다고 공표를 했습니다.
어렸을 땐 많은 SF영화들이 그려내는 미래를 보면 꿈의 세계를 보는 듯했습니다.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시공간을 초월하고,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가상과 실제가 혼재되어 모든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보이는 그런 세계죠. 시공간을 초월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미래 세상들이 어느새 인가 이미 우리 삶 속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들을 더 편리하게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 간의 단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은둔형 외톨이들이 인터넷 세계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바깥출입 없이 생활하는 모습이 단편적 예입니다.
하지만, 전 앞서 이야기했던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내용들을 접하면서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많은 예술사조와 다양한 패션 유행들이 그러했듯이 어떤 개념들이 세상을 흔들어 놓으면, 그와 상대되는 개념들이 부각되곤 합니다. 이러한 대응관계 속에서 다시 '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죠.
최근 인공지능의 화제성과 과학과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하고 걱정을 하지만, 동시에 이와 상반되는 인간 본연의 '성질'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는 듯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BIG HISTORY (인류의 기원부터 현재와 미래를 통합적으로 탐구하려는 움직임)에 관심이 많이 가고 있습니다. 많은 학술자료나 관련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면, 인간은 '동물'적 패턴을 많은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성적 사고' 보다도 '동물적 본능'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죠.
원숭이와 인간이 분리되는, 인류기원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1년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문명을 가진 시간은 고작 2시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365일 22시간을 우리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적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 책 '행복의 기원'중에서....)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동물적 본능'이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동물적 본능의 핵심이 되는 것은 '생존'과 '번식'의 개념입니다. 여러 관찰과 연구에 의해 보고되는 내용들은 현대 문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실험 결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받아들여 굳이 '우리는 동물이다'라는 자기 비하를 하자는 의미는 아니고, 쉽게 변하지 않은 이런 습성들을 인정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적 아이템을 개발하는 게 더 영리한 방법이겠죠.
앞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에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모두 담겨 있네요.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과학이 지금보다 1000배 이상의 속도로 발전하더라도(Open-AI회사의 CEO 샘알트만 발언) 우리는 동물이며,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기술의 발전과는 별개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 내는 세상 변화의 본질을 더욱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전히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고, 사랑과 감정에 목말라하고, 그리운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도움을 받을지 언정 그 주체는 오감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이죠.
상업공간이 어떠해야 하는가? 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제가 느닷없는 메타버스,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고 BIG HISTORY를 공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변하지 않는 본질에 더 충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기술이 발전이 궁금해지는 것보다, 무엇을 위하여 기술이 필요한지가 중요해진다고 보입니다.
변화는 알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지, 변화의 맥을 짚을 수 있다면 두려움은 조금 작아질 것입니다.
잠시나마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