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는 이들에 대한 개인적 견해
지인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 친구 중의 한 분이 원스타인 군인인데 이번 윤석렬 내란사태에 연루되어서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럴 때 우린 흔히들 참 재수가 없으셨나 보다...라고 이야기 하곤 합니다.
저도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 같네요.
'재수 없다'는 재수(財數), 즉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있을 운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운수가 없으니, '재수 없다'는 말은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안 생기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우리는 일상 속에서 본인의 뜻이나 원하지 않는 상황이 생겼을 때 이런 표현을 쓰고, 때로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시는 분들 중에 그 누가 명확히 '재수 없는 얼굴'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계엄사태(내란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이 유명한 용어 중의 하나인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곤 합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라는 분이 1963년 예르살렘에서 진행되었던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공개재판을 지켜보며 한 권을 책(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내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6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사유의 무능력’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기원을 이야기합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와 같은 집단에서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죠. 그만큼 명령은 절대적이고 우리 인류는 군대를 이렇게 교육시켜 왔습니다. 전장에서 각자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일사불란한 작전을 진행할 수 없겠죠. 그래서 군대는 명령이 중요합니다.
이런 명령집단은 개인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우린 이번 윤석렬 계엄사태를 접하면서 유능한 개개인이 어떻게 집단에서 '멍청해'지는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창조적 시선'이란 책에서는 '모든 종류의 '집단행동'은 합리적 사유의 경계선을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아침 운동장 조회, 교련과목, 제식훈련, 학생복, 밴드부... 이런 많은 것들이 집단행동을 야기하는 것들이고, 이런 잔재들은 독일을 배운 일본을 거쳐서 우리에게 심어진 것들이죠. 이렇게 개인의 사고를 제한하는 집단에서는 명령과 복종만이 진정한 미덕이 되는 겁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불법계엄상황 속에서 제대로 항명하나 나오지 않은 고위 관료층에 개탄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분들이 시키는 대로 생각을 점유당한 모습이겠죠. 어쩌면 지금 우리의 교육이 이런 모습을 양성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 봅니다.
독문학자인 김누리교수는 자신의 책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이 시대의 '불행'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 학습된 것이기 때문이죠.
히틀러로 인한 광기의 시대를 겪은 독일 인들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내린 결론은 '경쟁교육'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라고 인식하면서 독일교육에서 등수를 없앴다고 하네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이 있습니다.
성적을 매기고 등수를 올리려면 같이 공부하는 학우들을 앞서야 하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님이 좋아하고 선생님이 좋아하고, 주변에서 찬사를 받습니다. 등수가 내려가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듯 자살을 결심하는 학생들도 있죠. 그렇게 교육되고 훈련된 학생들은 사회에 나와서는 더 잔인한 경쟁에 부딪히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삶에 있어서의 '최고의 선'은 남들을 앞서가는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찬사'를 받고 자란 이들이 이 나라의 관료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미래를 위해 한발 한발 디뎌가면 됩니다. 그러면 연금도 나오고 평생을 인정받으며 잘 살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 자식들 의사가 되길 바라고, 판사 법관이 되길 바랍니다.
이 시점에 전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정치는 어떤 이들이 해야 할까요?
지금의 여당과 야당의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의 과거가 사뭇 다릅니다.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혹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AI로 인해 지식혁명이 진행되는 이 시기에는 더 이상의 암기력이 뛰어난 이들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 아닌, 대중과 공감하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민주주의는 협력의 시스템입니다.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스템이죠.
그래서 느립니다. 매번 논의를 통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기에 번거롭기도 하며 지루한 논쟁에 지치기도 하죠. 중국인들은 이런 대한민국을 보면서 '혼란스럽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경험을 못해서이죠. 민주주의의 장점을 인식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원적이고 빠르기만 한 결정이 옳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민주적 절차를 통한 결정이 꼭 옳은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행위. 그래서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하는 기본적인 소양이 민주주의에서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저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시스템에 윤석렬은 히틀러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참 우매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전 0.73%의 지지율 우세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 나라의 혼란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일까지는 생각 못했었네요.
'재수 없음'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하게 됩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는 모습이 있었다는 연구결과들이 있죠. 여러 사료와 자료에 기초해서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주의자였다는 겁니다.
'전체주의 체제든 아니든 독재와 억압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료제 또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인식의 전제입니다. 그것에는 지배 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자기 형성의 과정이 항시 존재합니다.' _ 기사인용
'독재는 명령으로만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독재를 지지하고 찬양하고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이들은 신념이든, 경제적 이득이든, 권력의 획득이든...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따른 명확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재수 없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