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작가 with 공동체공간
마을이라는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리는 동네에서 자랐다.
마을이라는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리는 동네에서 자랐다. 높고 세련된 건물 대신 아기자기함이 잔뜩 묻은 곳이라 가끔 놀러 오는 친구들은 ‘읍내’에 온 것 같다고 웃었다. 높아봤자 4층인 건물에는 분홍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칠해진 간판들이 알록달록 올려져 있었다. 그 사이를 내달리며 숨바꼭질을 하고 얼음땡을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 전체가 나의 놀이터였던 것 같다. 슈퍼 사장님은 바쁜 와중에도 동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그때 비로소 내가 우리 동네 주민임을 실감하곤 했다. 내 유년 시절 기억은 아주 알록달록하고 따뜻하다.
청량한 날씨라는 말이 딱 어울리던 날, 오류동에 있는 흥부네그림책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구름이 큼직큼직 통통해서 나도 모르게 순수한 마음이 피어날 것 같은 그런 하늘이었다. 지도를 보며 걷다 거의 다 왔을 때쯤 고개를 들어 도서관 쪽을 바라봤는데, 세상에. 이렇게 알록달록 예쁠 수가. 꼭 그림책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책 같은 풍경 속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큰 그늘에 작은 야외 서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있었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도서관 문을 열었다.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의 내부는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들여놓은 듯 외관보다 더 알록달록했다. 정리된 책장을 쭉 둘러보면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도서관을 가꾸는지, 그림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나란히 정렬된 서가가 있는 한편 외국 작가와 국내 작가를 나눠 작가별로 정리한 서가가 따로 있다. 다른 한쪽에는 어린이들이 선정한 추천도서로 북큐레이팅이 되어 있기도 했다. 작지만 알차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왜 하필 그림책 도서관이어야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화책은 아이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을 관리하시는 관장님은 딱 한 마디로 좁은 생각을 바꿔주셨다.
“0세부터 100세까지 같이 즐길 수 있는 건 그림이에요.”
오전엔 가장 먼저 성인분들이 동아리를 하러 도서관에 들어오신다. 그림책 도서관에서는 그림책 열람 이외에도 다양한 동아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중이다. 니들펠트, 독서토론, 낭독모임 등. 이곳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 줄 동아리 모임이 오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엄마들이 이곳에서 햇살을 맞아가며 공부를 하고 있으면 곧이어 우당탕 아이들이 신나게 들어온다. 오자마자 책가방을 내려놓고서는 친구와 손잡고 마당에 앉아 오래도록 뛰어논다. 늦은 오후엔 작가님의 강연 등 또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편한 차림의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 출석하는걸 보다 보면 하루가 어느새 다 지나가 있다. 주말엔 중학생들이 와서 봉사활동을 하다 가기도 한다. 이렇듯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의 하루는 사람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
이 밖의 어르신들을 위해서 가끔은 도서관이 마을로 나간다. 찾아가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책 배달을 하는 것이다. 노인정과 지구대, 동네 세탁소, 미용실, 편의점. 도서관을 방문하기 어려운 곳에 한 달에 두 번 다섯 권씩 책을 빌려드린다. 가끔은 읽어드리기도 한다. 미용실에 들른 동네 주민들이 놓인 그림책을 읽기도 하니, 온 동네가 도서관 열람실인 셈이다. 요즘은 찾아가는 도서관의 책 수레 소리가 반갑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은 온 동네와 소통하고 있다.
길가다 문득 ‘요즘은 애들이 도대체 어디서 노는 거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디에 가도 길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드는 생각이었다. 그 아이들이 사실은 다 여기에 와서 놀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마당은 아이들의 생기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당에 특별히 대단한 놀이기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올라탈 수 있는 작은 그물 하나와 작은 텃밭.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물 하나에 올라가 온종일을 수다 떨고 뛰어논다.
사실 이곳은 일부 주민들에 의해 거대한 놀이터가 들어설 뻔했는데,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을 사랑하는 모두가 함께 반대하여 마당을 지킬 수 있었다. “마당 바로 옆이 차도이고 내리막길이에요. 놀이터가 되기엔 적합하지 않은 거죠. 무엇보다 지금처럼 빈 곳이 마당으로 기능한다면 모두를 수용할 수가 있어요. 동네 어르신들도 잠깐 쉬어갈 수 있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러다 야외 서가의 책도 읽을 수 있고. 그런데 놀이터로 한정시킨다면 아이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무엇보다 지금처럼 빈 곳이 마당으로 기능한다면 모두를 수용할 수가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꼭 기구가 있어야만 놀이터가 아니죠. 미끄럼틀 없이도 아이들이 잘 뛰어논다면 그 역시 놀이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거예요.”라는 말을 듣고, 공간을 채우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사람으로 채워진 이곳에서 뛰어놀며 자란 아이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아이들의 유년 시절은 분명히 따뜻한 기억일 것으로 생각한다.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의 최고 장점이 뭘까요?
'생동감?'
관장님께서는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의 최고 장점이 뭘까요? 라는 질문에 ‘생동감?’이라고 답하시곤 수줍게 웃으셨다. 생동감이 생기 있게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곳은 넘치게 생동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타 도서관과는 다르게 이곳은 총 7명의 운영위원의 자원봉사로 관리·운영되고 있다. 2013년부터 그림책 꽃밭이라는 독서모임에서 시작해 이 공간을 위탁받아 운영하기까지. 그저 마을과 소통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공간을 꾸려왔다.
이 공간을 생기 넘치도록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다양한 종류의 동아리이다. 이것 역시 7명의 운영위원이 각각 하나씩 맡아서 기획해 진행하고 있다. 니들펠트와 독서토론, 낭독 동아리 등 제일 자신 있는 것들로 프로그램을 기획하니 여기저기서 상을 타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려움은 언제든 불쑥 찾아온다. 올 초에는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의 모든 프로그램이 잠깐 휴식기를 가졌다. 따로 임금을 받거나 수익이 나오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운영위원으로서의 활동이 힘들었다. 쉬고 나서부터는 각자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들로 프로그램을 개편했다. 지금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다.
따로 돈을 받지 않고도 누군가를 위해 오래도록 일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려워도 도서관을 계속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책 읽고 글 쓰며 나눴던 얘기들이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쉽게 날아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마음속에 꾹꾹 새겨진다는 관장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도 새겼다. 아무래도 이 공간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마음’ 딱 하나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워도 도서관을 계속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책 읽고 글 쓰며 나눴던 얘기들이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는 운영위원끼리 그림책을 직접 손으로 그려가며 한 권을 완성했다. 손수 만들어보면서 그림책을 만드는 전 과정을 알았으니 이제 누군가와 함께 그림책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희는 그냥 평범한 아줌마들이에요. 근데 이곳에서 도서관을 운영하고,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갖게 됐고 그 실천으로서 이 공간을 택했기 때문에 잘해나가리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훗날엔 흥부네그림책도서관이 얼마나 더 풍부해질까를 기대하게 됐다.
로컬공간기록 프로젝트 도시작가 시즌2, 이태림 작가
본 글은 서울시공동체공간 X NSPACE with 도시작가 프로젝트로 쓰였습니다.
흥부네그림책도서관
서울 구로구 고척로1길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