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김영하
김영하 작가의 책은 처음 읽게 되었다. 그렇게도 유명한 분인데, 이상하게도 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많이 알려진 책도 많은데 나에겐 그랬다.
그러다가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을 매 시즌 나올 때마다 즐겁게 봤다. 여행지에서 출연진들의 지식에 기반한 잡담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 이미 가 본 곳을 출연진들은 가서 보고 느끼고 와서 저녁에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떤다. 알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새롭게 느껴지고 모르는 곳은 ‘미지의 세계’에서 한층 더 가까이 느껴지게 되었다.
김영하 작가를 제대로 보게 된 것도 이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 분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쏙 빠져들어갔었다.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이 분의 지식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소설책보다는 이번에 나온 에세이, <여행의 이유>. 너무나 읽고 싶어 졌다.
TV 프로그램 하나에 완전히 꽂혀서 관심이 책까지 이어졌다.
읽는 내내 <알쓸신잡>의 확장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어지는 기분이랄까. 작가만의 경험에 바탕을 둔 여행 노하우를 소개하는가 하면, 여행 이야기, 여행에서 돌아온 현실에서의 이야기까지. 여행지에서 작가와 함께 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일상에서 여행의 기분을 느끼며 꿈꾸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집필을 하기 위해 떠났던 곳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주문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실패의 경험도 여러 번 하게 되면서 기대했던 것과 달리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쓸 거리’가 생기고 새로운 경험치가 쌓인다. 항상 그래 왔다. 완벽하게 여행 계획을 세워서 간다 해도 뜻밖의 사건이 생겨서 당황스럽게 스케줄이 꼬이거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어디로 갈 것인지 알아보고 그곳에 관련된 책을 찾으며 루트를 짜는 것만 해도 너무나 좋다. 캐리어에 짐을 넣고 공항을 가면 내 기분은 이미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있다. 그다음, 가장 좋아하는 순간인 비행기가 이륙할 때!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는 지금,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승객은 안전벨트를 맨 채 자기 자리에 착석해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는 순간이다.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p.202)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지인 곳이 작가에게는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일상에서 여행을 떠올리고 그때의 느낌을 다시 꿈꾸며 집필을 하기도 한다. 여럿 여행기를 읽으면 작가의 이야기, 여행 잔상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기에 지루한 면이 항상 있었는데 이 책은 그렇지가 않다. 여행 냄새를 풍기면서 여행의 맛을 제대로 알려주기도 하고 작가의 깊은 인문학에 기반한 ‘그곳’ 이야기도 해 주기도 하기에 읽는 동안 무척이나 즐거웠다. 여행의 목적을 떠올리다가도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사유의 길을 조금씩 닦고 넓혀가고 있다. 작가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다.
나에게도 여행은 아마도 생각의 통로가 열리는 경험이지 않을까. 뜻밖의 사건이 항상 일어났었다. 늘 예상치 못한 순간은 또 다른 새로운 즐거움을 주거나 힘들다고 투덜거려도 어찌 되었든 간에 그곳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적응 능력치를 올려주기도 한다.
여행지에서는 이렇게 우리의 능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성장하기도 한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