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허혁 지음
전주에 태어나서 석 달 넘게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군 생활도 고향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나이 오십에 나고 자란 곳에서 시내버스기사가 되어 한 일은 결국 지난날 나를 만나러 다니는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어린 시절, 사춘기, 젊은 날의 추억이 뭉클뭉클 새겨져 있다. 그 거리마다 함께했던 친구들, 나눴던 이야기, 꿈, 타고 다니던 버스 등등. (p.58)
살아가는 데 있어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밥이나 먹자! 다섯 마디 외는 모두 미혹이듯 버스에서는 간다, 안 간다, 딱 두 마디만 진실이다. 쓸데없는 소리가 쓸데 있는 소리보다 많다. 마음이 시간을 앞설 때마다 싫은 소리가 난다. 어느 사이 기사는 클레이사격장의 타깃처럼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마음을 정조준한다. 운행 중에는 시간을 잊는다. 아니 시간이 된다. 시간의 블랙홀에 버스를 얹어 간다. 몸에 딸린 오감은 도로의 결을 살피느라 전혀 여력이 없다. ‘내리고 싶은 자 편히 내려주고 타고 싶은 자 얼른 태워주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운전에만 집중할 것’은 인사조차 받지 않는 기사의 숨은 사랑법이다. (p.179)
시내버스로 하루 열여덟 시간 정숙 주행할 수는 없다. 힘도 달리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이따금씩 안정적인 기계 조작에 실패해 당신 몸이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생각 없이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마음으로 버스를 타면 좋겠다.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