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좋아한 책이고 습관처럼 손에서 놓지 않기도 한 책이지만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가 독서 습관이 바뀌게 된 날이 왔다. 2014년 겨울부터 하게 된 아침 독서모임. 우리는 같은 책 한 권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과 그로 인해 깨달은 것, 그리고 내 일상에 적용할 것을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일주일에 1권, 한 달에 4권. 그렇게 우리의 모임은 1년을 넘기고 2년이 되도록 지속되었다. 함께 읽기도 즐겁지만 모임에 나가서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을 말하려고 하니 미리 정리를 해 봐야 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책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은 막 다룰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 모시고 있었고 특히나 좋아하는 책은 두 번, 세 번, 열 번,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있기에 잘 보관해야 했다. 그랬는데, 모임을 시작하면서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밑줄도 긋고 마음에 깊이 와 닿은 문장은 귀퉁이를 한 번 접고 두 번도 접으라고 한다.
처음 책의 귀퉁이를 접고 노란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었을 때가 기억난다.
조심하며 예쁘게 접고 똑바른 선으로 밑줄 긋고 싶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 졸였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긋고 접으며 끝냈다.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서슴없이 밑줄을 좍좍 긋고 느낌을 작게라도 메모 해 둔다. 책을 아껴서 다루던 나였기에 당연히 책에 바로 메모하지도 못했다. 대신 포스트잇을 붙여서 그 위에 써 두었다. 내 책은 소중하니까. 나중에 다시 책을 펴서 보면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에 읽는 재미가 한 층 더해진다.
밑줄 긋고 귀퉁이 접어 읽기를 하고 있으니 책 읽기에 더 재미가 붙었다. 이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왔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노트에 손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왜 읽었는지, 인상 깊었던 문장 필사와 다 읽고 난 다음 나에게 적용해 볼 점을 짧게부터 적었다.
처음으로 기록했던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리처드 J. 라이더·데이비드 A. 샤피로 지음
훌륭한 대화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사소하고 가벼운 주제가 아닌 가슴에서 솟아나는 진지한 주제로 대화해야 한다.
깨달은 것 :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 가벼움이 아닌 진솔한 사람이 되자.
2014년 11월 19일에 이 책을 기록하고 밑줄 그은 문장에서 깨달은 것을 적어두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벌써 5년도 넘은 손 글씨 기록이고 짧디 짧은 생각의 줄기였다. 요즘은 이 기록들을 보고 다시 책을 찾아 읽는 재미를 자주 느끼고 있다. 5년 전의 나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지 들여다보고 돌봐주고 싶다.
어떤 날에는 펜으로 쓰고 쓰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날도 많았다. 마음을 때리는 문장이 많은데 이 많은 것을 노트에 다 적고 있으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엇보다 손가락이 너무나 아파왔다. 대체 어떤 책이 내 손을 가장 괴롭혔을까, 찾았다.
정여울 작가의 책이었다. 밑줄 그었던 문장을 손으로 쓰고 아래에 단상을 쓰다 보니 A4용지 두 장이 나왔다. 세상에나! 책 한 권 기록하느라 많은 시간을 들이고 손가락도 아파왔다. 마음에 훅 들어온 좋은 문장이 많아서 인덱스를 보이는 대로 붙였더니 이런 참사가 벌어졌다, 그것도 다음번에 읽었던 정여울 작가의 두 번째 책을 기록할 때도 똑같았다. A4용지 두장을 손으로 빽빽하게 쓰고 있었다. 정여울 작가의 책을 좋아하고 내 것으로 쏙쏙 흡수하고 싶은 글이지만 이 날 후로 나는 결심했다. 컴퓨터 워드로 기록하겠다고 말이다. 손으로 기록하지 않겠다.
완독 한 책은 계속 쌓이는데 손으로 쓰기 귀찮고 한번 쓰기 시작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알고 있기에 기록하기 조차 망설여지는 날이 반복되었다. 분명 손으로 쓰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읽은 책이 많아지면서 좋아하는 작가와 책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질 건데, 손으로 쓰며 기록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컴퓨터로 기록을 해 놓으면 나중에 다시 보기에도 편하고 오래 두고 저장하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여태 나는 A4용지에 적당히 기록할 내용의 양식을 만들어서 필사하고 단상을 썼고 훼손될까 봐 미리 걱정이 되어 비닐 속지에 넣어 바인더에 꽂아두고 있었다.
그래, 이제 그만하자.
그 후부터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컴퓨터에 기록해 놓고 있다.
확실히 손으로 한 자 한 자 쓰는 것보다 키보드를 치는 게 빠르고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오래전에 기록해 놓았던 책 기록 파일을 열어보며 읽기도 한다. 이것도 하기 버거운 날이 분명 있다. 돌쟁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이가 낮잠을 몇 시간씩 잘 자는 것도 아니고 밤에도 무사히 깨지 않고 자는 것도 아니다. 읽은 책을 기록하길 몇 년 동안 습관으로 잘 만들어 놓았는데 아이를 낳고 한 순간에 무너졌다.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읽을 시간도 없는데 기록도 하라고요?’
이런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 다 읽은 책, 다 읽진 않았지만 그만 읽고 싶은 책, 필요한 부분만 읽은 책, 모두 그대로 책장에 두지 말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이다.
책 표지를 넘긴 가장 첫 장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포스트잇을 하나 붙인다.
- 거기에 언제 읽었는지 날짜를 적는다.
- 어느 분야의 책인지, 어떤 내용의 책인지 한 단어로 적어두자.
- 나만의 별점도 매겨보자. 별 5개 중에 3개라던가, 얼마큼 내가 이 책을 읽고 감동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지 알게 된다.
- 마지막으로 지금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을 쓴다. 길게 쓸 필요도 없다. 한 줄, 두 줄이든 나에게 어떤 감정과 깨달음을 주었는지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시 읽게 될 수도 있다. 포스트잇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내가 다시 만나 감정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은 바로 다음의 감정의 기록은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생생하기에 무척이나 소중하다.
시간이 날 때 포스트잇 메모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기록해 두기도 한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 여유가 없는 사람, 틈나는 대로 책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