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의 함정??

다수가 지지하는 후보 vs. 정의로운 후보??

by 생각공장






유행하는 상품 (대세 후보)을 살지? vs. 가성비가 좋은 상품 (실속 후보)을 살지?


패션 산업의 거물 (big names) 들에 의해 뉴욕, 런던, 밀라노 등지에서 한 트렌드가 만들어지면, 놀랍게도 전 세계의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특정 계절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해진 기준 (유행 혹은 트렌드)에 근거해 옷이나 액세서리를 디자인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란 어느 소수의 의해 정해질 수 없다는 매우 상식적인 주장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마치 세상이 마법에 걸린 듯 누군가가 정해준 그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아무 생각 없이 다수가 따른다. 19세기 중엽에 에두아드 마네의 '소풍에서의 점심'이란 작품으로 시작된 모던 아트는 이렇게 획일적인 예술의 기준 즉, 아름다움에 대한 전문가의 표준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예술적인 저항의 흐름을 우리는 아방가르드 (avant-garde)적인 모던아트라 부른다. 모던 아트 이후로 획일적인 예술의 기준 (유화물감과 캔버스, 청동과 대리석, 환각법 등)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되고 이러한 유일한 기준에 대한 도전이 모던 아트의 주된 철학이 된다. 그래서 20세기 초의 반 예술 운동 (anti-art movement)의 대표인 마르셀 뒤샹 (소변기)부터, 피카소 (황소의 뿔, 개코원숭이와 새끼 등), 잭슨 폴락, 그리고 팝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전통과의 단절, 혹은 미와 예술이 가진 획일적인 기준의 파괴를 시도해왔다. 물론 이 와중에도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반 (anti-)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흐름도 존재했다. 대중적인 패션잡지인 보그 (Vogue)가 대표적인 예다. 대중이 선호하거나 상식적인, 혹은 정해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반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운동의 한 예가 보그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유행에 대한 획일적인 기준은 그야말로 지배적이며 폭력적이다. 보그와 같은 대중매체, 이런 대중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 그리고 이 자본과 결탁한 패션 산업계의 거물이 정한 미의 기준에 따라 십 대들이 가진 이상적인 몸매에 대한 기준이 결정되고, 심지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매와 얼굴을 패션모델과 배우들에 비교하는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서양적인 미의 기준에 맞추려 작은 얼굴, 쌍꺼풀 수술, 업 (up)된 엉덩이, 긴 다리 등을 만들기 위해,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말 그대로 피나는 (?) 노력이 아시아의 한 국가인 한국에서 흔하게 목격된다. 대중 미디어를 통한 획일적 기준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긍심을 훼손하는 폭력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없이 그저 다수는 그 기준을 따른다. 유명 배우나 모델로 대표되는 외모의 특성, 패션 스타일, 메이크업의 방식 등을 따라가면서 그 아름다움에 자신을 맞추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지구 상에 존재하는 2백 만종이 넘는 생명체 중에 인간처럼 한 가지 미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못생겼거나 뚱뚱하다고 규정하는 생명체가 없다는 사실은 스스로 가장 똑똑한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다수 인간의 뇌 속엔 전혀 인식되지 못한다. 유행이나 트렌드는 말 그대로 강의 거대한 흐름처럼 대세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 대세를 따라가며 안심한다.






패션 트렌드를 무뇌아적인 상태로 따르는 것처럼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도 대세 (trend)를 따라야 하는가?


필자가 한 발 물러선다면 패션은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는 이렇게 다수가 가는, 혹은 다수가 따르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면 안 된다. 옷이나 액세서리를 고를 때에도, 심지어 유행을 따라 구매할 때에도 최소한 가격비교 정도는 해 본다. 선거는 4,5년에 한 번 공적 서비스 (교육, 의료, 보육, 주거, 연금, 고용보험 등)를 구매 대행해 줄 대리인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을 뽑는 매우 중요한 구매 결정이다. 하루하루 구매하는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 가격의 10%를 이 정치인들에게 부가세란 이름으로 맡긴다. 담배나 복권 가격 중에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 쩐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시민이 월급을 받거나 자기 사업을 하면서 악착같이 삥 뜯기는 돈이 적게는 연간 수백 만원에서 수천만 원, 심지어는 전문직 종사자가 내는 세금의 양은 성실납세자라면 수억 원에 이를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과 같은 4대 연금도 우리가 내는 세금에 포함된다. 노동자인 시민 다수가 납부하는 세금을 어떤 우선순위로 얼마큼 어디에 써야 할지를 자기 맘대로 결정할 권한을 가질 사람을 뽑는 선거가 바로 올해 5월 9일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정치인이 어떤 정치철학을 가졌는지에 따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계층 중에 어느 계층이 혜택을 보게 될 건지, 아니면 손해를 입게 될 건지가 결정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이 될 정치인의 정치철학에 따라 1% 혹은 0.1%의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을 펼칠지 혹은 나머지 99%를 위한 정책을 펼쳐질지가 결정된다. 예를 들면 국가 경제의 가장 중심적인 축이 대기업이라고 생각하거나 역사는 소수의 탁월한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주도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면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이 대기업의 연구개발 (R&D)을 위한 보조금으로 투입되거나 4대 강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건설 대기업에 막대한 양의 국민 세금 (최소 22조 원)을 그들의 이윤으로 몰아줄 수 있다. 반대로 하우스 푸어, 메디컬 푸어, 미취업자 혹은 실업자와 같이 경제적인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중시하는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매년 400조가 넘는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 너무 쉬운 질문이다. 내수 즉, 시민 다수의 소비가 살아나게 함으로써 기업도 상생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시민의 낸 세금을 다양한 복지의 형태로 시민 다수에게 돌려주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시민 다수의 지갑에 여유 돈이 생기게 되고 이런 여유는 소비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돈은 소비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그 기업의 이윤은 다시 세금이란 형태로 정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압도적 다수가 선택한 이명박 정권,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다수가 선택한 박근혜 정권의 말로와 그 두 정권의 폐해를 보고 대세인 후보를 선택해야 할지, 아님 소수의 지지를 받지만 정의로운 후보를 뽑아야 할지를 신중히 생각해보시길 권한다. 대통령이 가진 정치와 경제에 관한 철학과 신념에 따라 5년 동안 누릴 시민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소위 진보, 보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삶이 눈에 띄게 바뀌지 않았을까? 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 글은 필자의 매거진 생각공장의 시선에 실린 '대통령 선택의 기준'이란 글에서 발췌한 글이므로 나머지 부분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https://brunch.co.kr/@ntdntg/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