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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Jul 05. 2019

행복하지만 무력한 침팬지가 되는 수가 있어!?

우린 왜 속았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계속 속기만 할까?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이 침팬지와 보노보라 한다. 인간과 이 친족 동물 유전자는 99%가 동일하다고 한다. 인간과 침팬지가 각기 다른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 상태까지 분리되는 데 6-8백 만년 걸렸다고 한다. 엄청 긴 세월로 인간에게 보이지만, 생명의 역사에서 이 기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지구의 역사는 대략 45억 년 정도고, 생명의 역사는 대략 35억 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인간이 진화의 나무에서 침팬지와 갈라져 나오는 6-8백 만년 기간 동안 자세, 먹는 거, 인지 능력 등에 있어 많은 변화를 했다고 한다. 일단 인간의 뇌가 침팬지보다 3배 정도 크기가 크다. 크기만 큰 게 아니라 엄청나게 에너지를 많이 쓴다. 성인 인간의 뇌는 자기 체중의 2% 정도이며 무게로는 1.5kg 안쪽이다. 그런데 이 뇌를 돌리기 시작하면 우리 몸의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가 만들어 내는 전체 에너지의 20%를 뇌가 사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머리를 써서 작정하고 사기 치려는 여러 종류의 꾼들을 이길 수가 없다. 정치인들, 기업가들, 언론인, 전문적인 사기꾼 등이 작정하고 시민 상대로 구라를 치기 시작하면, 다수 시민은 그들의 전술에 넘어간다. 왜? 상대의 의도나 검은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선 늘 긴장해야 하고,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뇌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뇌를 돌리기 시작하면 급 피곤해진다. 밥벌이와 공부에, 이 와중에 여러 곳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스트레스와 압박을 헤쳐 나가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 이미 지쳐 있다. 그러니 눈 감으면 코를 베간다는 사회란 걸 알지만 너무 지쳐 눈을 잠시라도 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은 코가 별로 없어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이렇게 말한다. "내 코가 석자다!"라고. 그래서 다수 시민은 뇌를 항상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 "자동 주행 모드" 즉, 무뇌 상태나 생각하지 않음 상태로 둔다. 그래야 힘이 덜 들어 편하니까.




그래서 소수 엄친아인 국회의원과 행정부 관료들이 법과 정책으로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는 데도, 그걸 민주주의라고 우기면(학교나 언론에서 교육하면)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다. 한 번만 생각하면, 소수만 모든 결정권을 독점하는 제도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단 걸 알 텐데도.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소수 관료만 우리가 낸 세금을 어디에 쓸지를 결정하는 게 반민주적이란 걸 인식하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하지 않는다. 뇌를 쓰면 피곤해지니까 그냥 안 쓴다. 그게 편하니까. 법원의 판결은 어떤가? 법이 뭔가? 법은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구성해 평화롭게 살기 위해 구성원이 정한 규칙이다. 그런데 그 생활 규칙을 누가 어겼는지를 어려운 한자로 쓰인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만 판단하게 해 놓은 상황에 우린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생활 규칙을 어겼는지의 여부, 그 규칙 위반을 어느 정도로 징계해야 할지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은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몰상식한 법제도에 도전하면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 운운하며 거품을 물고 난리가 난다. 한 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이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단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린 “견제와 균형”이라고 사기 친 “삼권의 독점”을 삼권의 "균형"으로 세뇌받고, 세뇌받은 줄도 모른 채 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난 왜 이리 자유롭지 못하지?”하며 궁금해한다. 때론 영문도 모른 채,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며 한탄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규칙 제정권, 예산 편성권, 규칙을 해석할 사법권은 공동체의 핵심 권한이다. 이것이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매우 조직적으로 촘촘하게 통제한다. 우리가 아닌 소수 엘리트가 모든 핵심 권한을 독점하기에,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없는”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의 선언이 구라가 아닐까?”라고 고민해봐야 하지만, 고민하면서 뇌를 쓰면 또 힘들어 피곤해지니까 하지 않는다. 가끔 무리해서 고민해보지만 작심삼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배당한다. 머리를 안 쓰니까 혹은 머리를 쓸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다. 물론, 머리 쓰는 사람(전문가)도 각자 머리를 써야 할 영역이 지정돼 있어, 자기 분야외에는 정작 어느 분야에 필수적으로 머리를 써야할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수많은 전문가가 있지만, 그들은 자기가 전공한 부분만 볼뿐 전체를 보도록 훈련받지 못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극소수도 존재할 것이다).




8백만 년 전의 침팬지는 생각하지 싫은 건지 아니면 피곤해서인지 현대 인간의 조상이 걸어간 진화의 길을 따라오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침팬지 지능이 인간보다 떨어지는 건 확실치는 않지만, 동물원에 갇히기도 하고, 인간이 개발한다며 자기 집인 숲을 파헤쳐도 소리 지르며 저항하지만 소용이 없다. 행복의 관점에서 침팬지가 인간보다 행복할 수 있지만, 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8백만 년 전의 침팬지를 보면서 난 갑자기 우리 대중문화가 생각났다. 우리는 뇌를 사용하기를 귀찮아하는 환경에 산다. 상상이나 논리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책보다는 영화를, 소설보다는 웹툰을, 어려운 철학책보다는 가벼운 에세이를, 책은 관두고 항상 동영상, 게임, 스포츠 관람과 같이 뇌를 최소한도로 굴리는 활동만을 선호한다. 웬만하면 뇌를 자동 주행 모드 즉, 에너지 절전 모드로 둔다. 이런 "무뇌 혹은 생각하기 싫음"의 문화가 생긴 데에는 지배자가 지어 놓은 피라미드 구조가 한 몫했다. 수많은 층위로 이루어진 높은 피라미드에서 갑질을 일상화시켰기 때문에, 자기 윗사람에게 당한 갑질을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풀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결국 갑질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게 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모두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니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뇌를 돌리는데 쓸 20%의 물리적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엔터테인먼트로 그 피곤함과 압박을 잠시 마취시키는 일상을 반복하다 죽는다. 이렇게 되면 죽음 앞에서도 자기 평생을 돌아볼 여유마저 충분히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생각을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문화를 살아가는 다수는 8백만 년 전의 침팬지나 보노보의 신세로 전락하진 않을까? 강자인 인간이 갑질 해도 무력하게 두 눈 뜨고 당하는 침팬지처럼 현재의 지배 계층이 갑질 하고, 자신의 경제적, 물리적 터전을 짓밟아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미래를 예측하는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상위 0.1%의 엘리트와 나머지 99.9%가 나뉘어 사는 디스토피아(dystopia)다. 멧 데이먼이 주연한 <엘리시움>과 최근에 개봉한 <알리타>도 이런 영화다. 극소수 엘리트가 사는 엘리시움은 전체 유전자를 스캔해 모든 병을 자동으로 치료해 준다. 인간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다. 알리타에서도 이런 곳이 지상의 세계 위에 엘리시움처럼 "자렘"이란 이름으로 하늘 위에 떠 있다. 하지만 엘리시움에서도 알리타에서도 이 소수가 사는 세계의 진입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고, 이 영역을 침범하려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한다. 인공지능과 나노공학이 융합해 인공지능 혁명이 도래해 그 혁명의 혜택을 소수가 독점하게 되면 이런 영화적인 시나리오가 우리 현실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0.1% 소수 엘리트가 사는 세계와 99.9%의 다수가 사는 세계가 나누어지고, 이런 격차가 백 년만 지속돼도(진화의 과정에서 백 년은 1초 정도로 느껴지겠지만), 이 짧은 순간에 현재 인간과 침팬지의 힘의 격차처럼 유토피아에 사는 소수 엘리트와 디스토피아에 사는 다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핵심 인공지능 관련 연구원인 레이 커츠와일은 이번 세기에 일어날 기술 혁명에 대해 이렇게 예측한 적이 있다. "지난 세기의 기술 발전 정도를 1이라고 가정하면 21세기의 기술 발전은 1000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자동 주행 모드로 있는 다수는 순식간에 닥친,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될 기술 혁명에서 마치 현재 침팬지가 지금의 인간을 보듯, 우리도 그 혜택을 독점한 소수를, 유토피아에 사는 그 소수를 침팬지처럼 무력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현재의 조류는 거대한 포식자를 피해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작은 동물들이었다고 한다. 이 약한 동물들이 나무에서 떨어질 것을 대비해 그 작은 팔다리에 깃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약하고 작기만 했던 이 동물들은 지상의 네발 달린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류의 운동능력과 이동능력을 갖게 되었다. 지구에 2백 만종이 넘는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한다. 각자 자기만의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잘 보고, 잘 듣고, 냄새를 잘 맡는, 엄청 빨리 달리고, 하늘 높이 나는, 대단한 위장술과 생존 능력을 보이는 생명체들이 있다. 종간 능력의 격차가 엄청나다. 특화된 능력을 키워나가 자신의 생존 영역을 지키고 환경에 적응한 생명체는 진화에 성공했다. 원래 생명은, 자연은 이런 것인가? 그럼 2019년 현재 세계의 권력을 쥔 극소수만 그게 화성이든, 엘리시움이든, 혹은 자렘이든 진화에 성공해 나머지 99.9%의 인간과는 차별화된 종으로 진화할 것인가? 책을 읽어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쉬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판단조차 안 되는, 혹은 책을 읽고 싶어도 일상에 지쳐 읽을 에너지가 없는 다수는 이제 침팬지로 전락해야 하는 것이 진화의 필연인가?




예수와 마르크스는 진화에 성공 가능성이 있는 0.1%의 엘리트 편에 서지 않았다. 그런데 늘 이상하리만치 이 소수 엘리트 집단은 자신의 반대 편에 섰던 예수와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을 높여 다수가 존경하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 지배그룹은 종교와 정치 제도를 교묘히 활용했다. 교회에서는 다수 성도에게 강자 편에 서게,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교묘히 왜곡했다. 정치 • 경제 • 종교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가르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밀려난 약자를 위해 죽었던 예수를 기리는 교회를 교묘히 권력자를 우러러보게 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마르크스 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당은 어떤가? 사회당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념을 가진 이들이 "마르크스가 빠진 이름뿐인" 사회당으로 만들었다. 예수가 교회에서 질식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사회당에서 살해되었다. 더 이상 예수와 마르크스는 교회와 사회당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영웅 영화나 예수, 마르크스 얘기 들으며 “누군가 나를, 그게 정치인이든 어벤져스 같은 영웅이든, 우리를 구해주겠지!”하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자기 운명은 스스로, 혼자 안되면, 혼자는 안된다고 느꼈던, 그리고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해 개척해 나가는 게 현명해 보인다.




99.9%에 속한 나와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한국은 GDP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11-2위 정도다. 어느샌가 대한민국은 우리도 모르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대중문화도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평등이나 자유, 민주주의 같은 심각한 문제보단 일상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무한히 다양해진 여러 엔터테인먼트를 즐겨도 되지 않을까? 진지하고 심각한 것도 좋지만 늘 진지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공장은 99.9%에 속한 우리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의 갑질에 무력한 침팬지처럼 "엘리시움이나 자렘과 같은 유토피아에 살게 될 소수 엘리트”를 넘사벽으로 보고 좌절하는 상황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에 떠 있는 엘리시움이나 자렘을 보며 저들을 극복하고 싶기보다 오히려 선망하는 어리석고 허약한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생각하자. 생각하기 위해선 책을 보자. 쉬운 책보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하는 좀 무거운 책들을 보자. 그중에서도 정치 철학서를 보자. 정치가 “기술 혁명이 가져 올 어마어마한 혜택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로 현재의 고통을 마취시키기보단 그 쓰라린 경험을 몸으로 견디며 이런 차별이 주는 고통을 없앨 근본적인 방법을 다 같이 찾아 나서보자. 쉽고 넓은 큰 길로만 가지 말고, 좁은 길을 선택하는 과감한 선택을 해보자. 길이 점점 좁아져 끊기면 좌절하지 말고,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없는 길도 한 번 내보자. 없는 길을 내다 지쳐 그 길에서 힘이 다해 죽어도 괜찮다. 누군가가 내가 죽을 때까지 만들어 놓았던 그 길에서부터 새 길을 내는 것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쉽게 쉽게 살다 죽으면 되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난 죽어도 되지만, 이런 세상을 우리 자녀에게 물려주고 편히 눈감을 수 있을까? 자기 자녀가 무력한 침팬지 신세로 전락해 엘리시움이나 자렘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유토피아를 보며 부러워만 하다가 디스토피아에서 죽게 되는 걸 누가 원하겠는가?




그러니 읽고 또 읽자. 죽을 때까지 평등한 세상을 이룰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하자.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한없이 약하기만 한 침팬지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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