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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Apr 29. 2020

취향관 인문학 살롱 - 동굴 밖 상상하기

동굴 밖 신세계가 주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수많은 존재의 가능성이 있어!







동굴 밖에 다른 세계가 있다!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에서 철학자는 평생 동굴 안에 살아 동굴 안이 그들이 인식한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이들에게 동굴 밖에  넓은, 자유가 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해주는 이들이다.  책에서 인간의 지성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동시대 지식인은 사람들이 믿는 대부분의 가치, 신념, 상식, 규범과 같은 것들이 빈약한 근거, 미신, 거짓, 사기에 바탕을  것임을 폭로하고, 대중은 이러한 깨달음을 거부한다. 이에 지식인들은 좌절하고 실망한다. 이것의 연속이

인간의 지성사다!” 현대인은 문화(문화는 거대한 생각의 강이다.  속에 다양한 신념, 가치, 상식, 심지어 편견 같은 것들까지  녹아 있다), 대중 교육제도, 언론이 주입한 세계관에 갇혀 산다. 이런 문화, 교육, 언론이 주입한 세계관이 플라톤이 말한 현대판 동굴이다.




나는 어떻게 내 동굴을 깨트렸을까?


“난 죽은 거나 다름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설적이게도 어머니 뱃속부터 주입된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동요하기 시작했고, 1-2년을 내 전통적인, 학습된 신앙 체계를 지켜내느라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거부했다. 그러던 중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3대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붙잡게 된다. 그러면서 20여 년 믿어 온 기독교에 대한 내 신앙과 세계관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 거의 10년이 흐르는 동안 내 동굴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해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 세계관은 내가 만드는 거야!


엄청나게 광활한 동굴 밖 자유의 세계가 나에게 펼쳐졌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엄청난 막막함과 두려움이었다. 그때부터 내 모든 가치관을 다 나 스스로 홀로 세워야만 했다. 바람이 불면 있던 길도 없어질 것 같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내 던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침반도 없이 인생의 사막을 헤쳐나가야 하는 임무가 내 앞에 놓이게 된 거다. 동시에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 평생 동안 작동했던 기독교적 가치와 신념 체계 즉, 내 동굴은 무너져 동굴 벽의 잔재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교회를 떠난 후 나 혼자 세계의 여러 종교에 대해 공부하고, 멘토를 찾으려 애쓰며 책과 생각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캐나다와 독일에서 살며, 유학하며 글을 논리적으로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내게는 세계를 투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막았던 거대한 동굴인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려다 내가 다칠 것 같아 집었던 돌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 섰던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그러던 내게 독일 유학 후 한국 사회의 여러 제도에 대해 공부하고 강의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법, 교육, 언론, (대중) 문화, 예술 등의 모든 제도가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종교라는 거대한 동굴에 더해 사람들의 눈과 귀, 결국은 그 감각과 생각을 가두는 여러 거대한 동굴을 목도하고 교회를 떠날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돌멩이를 던지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동굴의 벽은 어떻게 무너질까?


그게 브런치라는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여러 동굴의 실체를 알리는 거였다. 그 블로그를 보고 촛불 집회 당시 여러 시민들이 찾아와 6주 동안 일요일에 한 출판사 강의실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게 내 책 <거짓 자유>다. 동굴에 갇혀 있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동굴 밖 광활한 “생각의 세계”를 항해하게 하는 안내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동굴 밖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밖의 세상을 얘기하는 거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를 너무 과격하거나, 심지어는 세상 물정 모르는 몽상가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당연히 위험하게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굴을 깨야 하는 이유?


하지만 내가 갇혀 있던 동굴은 내 생각과 판단의 자유를 제한했고, 나를 가두었던 정치•경제적 동굴은 내가 사는 공동체의 규칙 제정에 참여할 권리조차 내게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했고, 내가 낸 세금도 정치인이 자기들 맘대로 써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교육이란 동굴은 성적이 잘 나와 서울대 들어간 자들이 자기들 맘대로 제도와 법을 만들고, 내가 너희보다 똑똑하니 내가 알아서 법을 만들고, 세금 걷어서 잘 쓰고, 규칙을 위반한 애들은 내가 판단해서 혼내 줄게!라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듣고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게 했다. “서울대 나온 내가 똑똑하니 중요한 문제는 내가 다 결정할 께!”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얘기를 삼권 분립이니, 대의 민주주의니 하며 외우게만 하게 했다. 선거는 정치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건 데 문제는 위임하는 권한의 종류와 정도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조건이 이렇게 불분명한 계약은 정치 빼고는 없다. 생명 보험을 하나 계약할 때도 약관 하나를 꼼꼼히 살피고, 보험 설계사에게 설명을 듣는다. 선거는 주권(결정권)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해도 빠짐없이 수백에서 수천 만원까지 내는 세금을 쓰게 할 공무원을 뽑는 거다. 문제는 내가 한 번도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이에게 거금과 함께 결정권을 헌납하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선거는 소수에게 주권 즉 결정권(막대한 세금 포함)을 몰아주는 기만적인 제도다. 반만 진실인 팩트로 시민을 기만하는 기레기 언론은 어떤가? 사법부의 이익을 위해 재판 거래를 하는 대법원은 어떻고, 피의 사실을 흘려 피고인에게 유죄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유도하는 검찰은 어떤가? 미디어나 패션 산업이 정한 미의 기준을 여과 없이 보여줘 모든 시민에게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주는 “미남(?) 미녀(?)”로 가득 찬 텔레비전 콘텐츠는 어떤까? 아마 2백 만종이 넘는 지구 생명체 중에 외모에 한 기준을 정해 놓고 자기들끼리 순위를 매기는 폭력적인 종은 인간뿐일 거다.


우리의 세계관을 주입하고 형성하는 거대한 동굴들이 우리가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인식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자유를 제한하는 말도 안 되는 세계관(동굴)이 내 자유를 억압해 목을 졸라 와도 내가 왜 답답한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하게 한다.




동굴 밖에 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존재의 가능성이 있다고!


동굴 밖 세계 존재를 인식하는 게 두려운 분도 있을 거다. 그분들은 내 말을 무시하셔도 된다. 하지만 평생 내가 살아온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다른 세계의 존재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 건 좀 안타깝지 않은가?. “세상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하지?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왜 이리 많지?” 라며 원인을 모른 채 답답해하는 분들에게 생각공장은 이렇게 권해 본다. “지금 살고 있는 동굴 밖을 상상해 보라고, 그 한 뼘도 안 되는 동굴 벽에 구멍을 내 보라고. 그러면 처음엔 두려울 정도로 많은 자유에 아찔하겠지만 곧 적응하게 될 거라고. 그 떨리는 광활함과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가능성이 다 당신의 것이라고!”




동굴 밖으로 내 손을 잡아 이끈 건?


“죽음”이라는 멘토가 나를 가두었던 동굴 밖으로 날 인도했다. 동굴 밖 세계를 본 이후론 다시는 그 동굴에 돌아가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또 두렵지만,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한 동굴 밖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해 본다. 물론, 그 동굴 밖 세상조차 또 다른 동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탐색해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우리가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일을 멈추어서 되겠는가?



살롱 취향관 인문학 강의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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