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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Mar 28. 2017

시민을 바보와 노예로 만드는 대의 민주주의

1460일 중에 단 하루만 정치참여를 허락하는 제도가 민주주의라고?






시민권을 정말 시민이 가지는 권리라고만 알아도 될까?     


시민권은 일단 정치적인 공동체인 한 국가나 시의 구성원임을 의미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공동체의 수많은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또한 공동체의 공적 사업에 대한 시민의 협력에 대한 조건과 규칙을 시민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시민권이라고 한다. 시민권에 대한 의미를 좀 더 확대해 보면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여러 가지 권리의 범위와 정도가 소수의 대표자가 아닌 다수의 시민들 스스로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민권은 헌법상에 보장된 여러 자유와 함께 사유재산에 관한 권리,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로 복지를 의미하는 사회적 권리 등을 포함한다. 동시에 이러한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고 어느 범위까지 확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시민들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16년 헬조선에서 시민권이란 시민인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권리를 정하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시민의 대표자인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과 정부의 여러 정책에 의해서만 시민권의 범위와 정도가 결정된다. 늘 그래 왔는데 왜 지금 이런 문제를 제기하냐고 물을 수 있다. 이렇게 문제 제기하지 않으면 계속 헬조선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수준의 시민권은 위에 언급된 시민권의 진정한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미완의 민주주의와 시민권 - 시민을 계속 바보로 만드는 사회와 제도??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시민들의 정치 참여의 범위는 대부분 투표행위의 형태로만 제한된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시민들은 투표 외의 정치 참여 방식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시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형성은 미국과 유럽의 민주주의의 형성과정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지난 최근 두 세기 동안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사적인 삶과 개인의 기업 활동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은 국가나 도시의 공적인 영역에 대한 정치적인 참여는 주로 투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체제를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소수의 시민은 정치 참여에 대해 적극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정치에 관련된 여러 활동을 소수의 정치인들에게만 맡겨왔다. 서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나 정치인들의 활동은 언론이나 사법부를 통해 감시되고 견제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대표적인 정치사가 중에 한 명인 쿠엔틴 스키너 (Quentin Skinner)도 서양의 민주주의의 발전이 시민의 의한 정부의 운영이라는 이상 (ideal)의 약화와 함께 발전해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대부분의 정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시민의 정치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시민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뿐만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 소수의 엘리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소수의 정치 혹은 경제 분야의 엘리트들에 의한 국가의 통치는 모든 시민은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시스템을 국가 내부에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결점이 있다. 장 자크 루소도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 즉, 법률과 규칙을 만드는 일에 시민이 직접 참여할 때, 그리고 정치 영역에 대한 시민의 적극적인 감시를 통해서만이 소수의 정치인들에 의한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460일에 하루만 정치 참여시키는 제도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해?


하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의 정치 참여 자체가 심각하게 제한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는 곳에서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대의 (간접)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의 시민의 정치 참여 방식은 주로 투표와 시위하는 정도일 뿐이다. 이런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그 제도는 시민을 계속해서 바보 (idiots)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바보 (idiot)란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idiote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바보란 사적인 (private) 삶에만 관심 있고 공적인 도시의 일에는 즉, 정치에는 관심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이나 법률을 정하는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규칙이나 제도가 동료 시민에 의해 시민 의회에서 정해질 때, 반대나 다른 의견을 제안하고 동료 시민을 설득할 기회 조차 얻지 못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공동체인 시의 살림보다는 자신의 집안일을 우선해서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 당장은 현명해 보이지만 이러한 이기적인 행동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불행하게도 4년에 단 하루 주어지는 투표를 통한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조차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버려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더욱더 불행한 점은 4년에 하루 투표를 통해 정치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인 지능의 미숙함이다. 왜냐하면 시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이러한 수준의 이해는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에 의한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닌 매우 귀족 중심적인 정치제도이지만 시민은 이러한 형태의 정치제도를 민주주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권층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대의 민주주의 or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는 demos (people) + kratos (rule), 즉 시민들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시민들이란 소수의 정치적인 혹은 경제적인 엘리트를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대부분의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해서 대한민국도 소수의 대표자에 의한 국가의 통치 즉, 대의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수의 정치적인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합법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제도가 대의 민주주의이다. 이런 소수의 대표자에 의한 정치제도는 너무 쉽게 자본가들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는 금권정치 (plutocracy)로 변질될 수 있는 심각한 단점이 있다. 소수의 정치 엘리트 간의 자연스러운 권력의 순환 정도가 대의 민주주의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목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4년에 단 하루 동안만 시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앞서 언급된 '시민 다수의 의한 지배'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와도 너무 거리가 멀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오늘날의 민주주의 형태는 상당히 위험한 제도로서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는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에게 4년이라는 위험할 정도로 긴 기간 동안 시민 자신의 권리를 정치인들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의 민주주의가 갖는 가장 큰 단점은 소수의 정치인들이 시민 다수를 합법적으로 지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입법권은 시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에 의해 합법적으로 독점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법률이 시민이 원치 않음에도, 혹은 시민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그 법률에 의해 침해되는 경우에도 시민은 어쩔 수 없이 그 법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대의 민주주의의 측면은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나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정치 엘리트가 만든 법을 통해서 다수의 시민이 지배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 시민에 대한 소수 정치인들의 지배를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이런 제도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이렇게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기다. 가장 심각한 대의 민주주의 단점은 금권정치가 너무나 쉽게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자.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자본가들이 결탁하면서 다수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기보다는 기업가들의 이익을 확대하고 보호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법들은 주로 다수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다. 미국의 경우 버핏세와 관련된 논란 그리고 국내에서의 부유세 도입에 대한 의도적인 방해 같은 경우가 금권정치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버핏세 혹은 부유세의 도입은 부의 지나친 편중을 막음으로써 빈부격차를 줄이고, 동시에 이런 세금 정책은 더 나아가서 의료나 교육과 관련된 복지제도의 확대를 위한 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의 대변자인 국회의원 다수는 이런 세금 정책이나 이와 관련한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할 때, 심지어는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입법 활동을 할 때,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인 표현은 무시하면 그만인 촛불시위 밖에 없다는 점이다. 원치 않는 여러 정책이 대통령이나 국회의 주도로 다수의 국민의 의사에 반해서 집행될 때 다수의 시민들은 그 정책이 집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동의하지 않는, 그리고 동의할 수 없는 법률에 의해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행동이 구속받는 상황에 우리가 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욱 불행스러운 점은 시민의 의사에 반한 정책의 집행, 그리고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법률의 제정과 집행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조치들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시민행동과 시위 자체가 위법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불법 시위, 불허된 집회' 등등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정치인과 이런 표현을 확산시키는 언론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주체들이다. 왜냐하면 헌법이 보장한 집회, 결사의 자유를 행사하는 시민을 범법자로 부름으로써 민주적인 시민들의 명예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민의 의사와 이익에 반하는 정책과 법이 시행되는 이런 상황에서 시민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의 민낯이다. 동의하지 않는 규칙이나 법률을 시민이 억지로 따르게 만드는 제도는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국민주권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모든 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온다'는 국민주권의 원칙과는 다르게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하에서 시민은 자신의 모든 권력을 소수의 정치인들에게 몰아준다. 역설적이게도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이 소수의 정치 집단은 입법권을 독점함으로써 시민 다수를 지배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보여주는 이런 역설은 돈을 빌린 사람이 그 돈을 빌려준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주인인 시민이 든 촛불은 바로 그 시민들의 하인 (공무원; civil servants)이 쏜 물대포에 의해 너무 쉽게 꺼져 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 자연스럽게 합법적인 민주적인 제도로 여겨지는 상황 인식에 대해 시민인 우리는 더 의심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법과 제도는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 법과 제도는 시민 다수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더 보장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부정 (denial)됨을 통해서 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에 의심과 비판적인 시선을 시민 다수가 거두면 법과 제도는 개선되거나 발전된 가능성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참고로 의심과 질문의 능력은 인류의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혁신을 이루어 낸 인간의 지성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지적 기술이다. 이렇게 의심과 질문이 사라진 즉, 제도와 법의 진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주인으로 대접받아야 할 시민이 여러 보이지 않게 조용히 만들어지는 법률에 의한 지배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될 수 있다.






권력의 원래 주인인 시민을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주인인지도 모르는 노예를 다시 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는 과연 존재할까?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대의 민주주의의 가장 큰 단점 중에 하나는 대표자 즉, 국회의원에 의해 시민의 의사가 왜곡된 채로 입법 과정에 반영되거나 다수의 시민의 의사나 이해관계에 반해서 법률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또한 공약을 전제로 당선된 대표자가 시민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도 쉽게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 혹은 입법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보장시킬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위에서 언급된 대의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민 발안 (People’s initiative)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제도 중에 하나인 국민 발안은 시민이 직접 동료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과 법률의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권리의 폭과 정도를 시민 스스로 결정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렇게 의회나 국회의 제출된 법률의 의결이 국민 투표 (Referendum)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 시민의 의사가 입법 과정에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다. 국민 투표제도는 시민주도의 국민투표 방식도 있다. 소수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법이 시민 다수나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법들을 입법 예고 기간이 끝나기 전에 국민투표로 가, 부결을 다시 결정할 수 있는 시민 주도의 국민투표 방식이 있다. 또 한 가지 시민 주도의 국민 투표 방식은 기존의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게 만들 수 있는 국민 투표 방식이다. 이런 두 가지 시민 주도의 국민투표는 일정수의 시민의 서명을 얻으면 시행 가능하다. 이 제도의 장점은 시민이 국회의 입법권 독점이 야기시킬 수 있는 폐해와 입법권의 남용을 예방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입법부의 입법권 독점을 시민이 견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시민 자신의 공동체에 관한 규칙 개정과 입법의 과정에 참여의 권한과 최종 결정권을 시민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로 나라마다 국민투표의 시행 방식은 다르다. 스위스의 경우 국민투표를 일 년에 3-4회 정도 시행한다. 국민투표용지에는 한 분기 동안 쓰인 법안들이 다 기재된다. 그렇기 때문에 매 사안마다 국민투표를 그때그때 시행하지는 않고 한 번에 여러 법안의 가결을 물을 수 있다. 이렇게 다수 시민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단점과 한계들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다. 스위스의 정치제도가 좋은 예다. 스위스의 국민 발안은 정해진 기간 내에 동료 시민 5만 명의 서명을 받으면 의회에 합법적으로 법안이 제출된다. 법안 제출 단체와 입법 전문가들이 법안의 표현을 다듬어서 완성한 다음에 국민 투표로 이 법안의 통과 여부가 결정된다. 심지어 헌법 조항까지도 시민 십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헌법 개정이 가능하다. 헌법의 주인이 시민이란 사실을 안다면 스위스의 이런 참여적인 정치제도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 제도는 시민 스스로의 참여와 시민이 직접 만든 법을 스스로 지킨다는 측면에서 시민을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제도라 평가할 수 있겠다.      







시민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정당성과 시민권의 미래     


2-3 주 전에 러시아 투데이에 의해 스위스의 ‘달콤한 최저 소득 법안’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법안은 시민 12만 명의 서명으로 의회에 제출되었고 올해 말에 이 법안에 대한 국민 투표가 예정되어 있다 (이 글은 2013년 11월 3일에 처음 작성되었지만 2016년 10월 17일에 수정됨을 알려드립니다). 스위스의 최저 소득 법안은 스위스의 성인 시민 누구에게나 우리 돈으로 매월 300만 원을 일을 하느냐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의 최저소득 (기본 소득)으로서 지급을 보장하는 법이다. 이 법의 제안자 중의 한 명의 인터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위의 시민들이 그 아이에게 환영한다고 말한 후에 우리가 너를 돌봐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너의 꿈은 무엇이니?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겠다.’ 이 인터뷰를 한 사람은 스위스에 태어난 아이가 위와 같이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저 소득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매월 300만 원이라는 정말 달콤한 숫자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민권의 범위와 정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시민에게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국민 발안이나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가 노예로 전락된 시민을 다시 진정한 주인으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시민의 권리는 소수의 대표자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잠깐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영국 내의 시민권의 형성 역사를 살펴보자. 첫 번째 단계로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 그러고 나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로 이어진다. 그 이후에 참정권 획득을 위한 시민의 기나긴 투쟁을 거쳐 마지막으로 복지를 의미하는 시민의 사회적 권리가 20세기 초기에 형성된다. 시민권의 형성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역사상 한 번도 귀족이나 엘리트가 먼저 나서서 시민에게 시민권을 허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참정권에 대한 영국의 시민권 형성에 관한 역사를 보면 항상 보수적인 영국의 엘리트들은 ‘망할 민주주의 (Damn Democracy)’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살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민들의 참정권의 획득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귀족들은 항상 불만을 토로하면서 마지못해 민주주의를 인정한다. 4년 중에 단 하루 동안만 시민의 정치참여를 허락하는 이런 원시적인 민주주의도 시민들의 기나긴,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얻어졌다. 아직도 헬조선에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제도를 민주주의라고 우기고, 또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복지인 교육과 의료는 무상 복지라는 표현과 함께 포퓰리즘으로 매도당한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이상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대한 기회는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시민의 사회적 권리 보장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미래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인 투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제도의 시행은 대한민국이라는 경제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연구 개발 (R&D) 분야에 대한 투자다. 이런 투자를 전적으로 시민에게만 부담시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며 공정하지 않다.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시민권 둘 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시민권을 더 완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더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시민권에 대한 시민의 이해 둘 다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진화는 오로지 시민의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모든 시민을 노예가 아닌,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시민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민 스스로 자신이 누릴 권리의 종류와 정도를 정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권이라는 이해로부터 민주주의는 진화할 수 있다. 이렇게 시민이 자신의 누릴 권리를 스스로 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지방 정부에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지방 정부의 여러 결정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하인들 (civil servants; 선출직 공무원들; 대통령, 도지사, 시장 등등)에게 주었던 권력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시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하지만 시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기본 정치 소양 교육과정을 이수한 시민들을 추첨을 통해 시의회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시민 자신이 누릴 권리의 종류와 폭을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 수 있다. 참고로 이런 제도들은 성공적인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미국의 오레곤주의 사례다. 이러한 정치 참여를 통해 시민의 정치 지능은 향상될 수 있다. 다른 여러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치 참여 방식을 통해 시민권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이상을 모두 실현시킬 수 있다고 세종은 굳게 확신한다. 사실 이런 진보된 정치제도에 대한 연구 결과는 엄청나게 쌓여 있다. 중요한 건 정치인의 의지다. 하지만 민주주의 진화는 그동안 정치인들이 독점해왔던 권력의 공정한 분배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제도 개혁에 참여하길 기대해선 안 된다. 시민이 요구해야 한다. 그것도 강력하게, 되도록이면 요구하는 시민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적이다. 정치인들은 자신 앞에 있는 시민의 머리수를 바로 다음 선거에서 득표할 표의 수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유에 대해 짧게 한 마디 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시민의 자유는 국가와 같은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할 뿐 만 아니라 시민 자신의 공동체인 국가나 시의 이익 즉,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시민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Bibliography     


Bellamy. R (2008), ‘Citizenship’,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Beramendi, V. and others. (2008), Direct Democracy: The International Handbook (International Institute for Democracy and Electoral Assistance).



Crick, B. (2002), ‘Democrac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Wokler, R. (2001), ‘Rousseau’,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Denis Balibouse, 'Swiss to vote on sweet minimum monthly income: $2,800' RT [website], (updated 29 Nov. 2013) <https://www.rt.com/news/swiss-adult-minimum-wage-794/>, accessed 17 Oc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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