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3장
(이 글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3장까지 읽고 나서 떠오른 단상들이다.)
90년대였던가, 아니면 지금도 그럴까, 여름 노래나 일상에 대한 위로를 전하려는 노래들의 가사를 보면 클리셰가 있었다.
“진짜 내 모습을 찾아 떠날 거야.” 같은 표현들이 그것인데, 어릴적에도 나는 그런 표현이 뭔가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콜라나 사이다, 오렌지 주스 같은 말이랄까. 어차피 영원히 떠날 수도 없고 어디로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일상’인데, 그걸 잠시 떠나는 건 잠깐의 격렬한 시원함 밖에는 얻을 만한 좋은 게 없는 신기루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과연 “진정한 자아, 진짜 내 모습”이란 게 무엇인지, 정말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을 갖게 된다. 상사 앞에서 부글부글 끓는 화를 폭발시키는 것, 훌쩍 삭발을 하는 것 (자우림, “일탈”), 신도림 역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것 (자우림, “일탈”)이 진정한 자아를 구현하는 방법일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왠지 슬퍼진다면 그건 아마도 한국 사회가 “도를 넘어선 착즙사회”이기 때문일 거다.
나는 진정한 자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그런 생각이 강해지면서 MBTI는 물론이고 사주, 에니어그램 등 개인의 ‘성품’이랄 것을 다루는 고전적인 방식부터 심리학과 관련된 연구들도 (특히 민감한 사람에 관한 것들) 꽤나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김현경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에서 사람이 되면서, 그러니까 아기가 사회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행동양식과 성품의 ‘경향’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약 진정한 자아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고, 이를 발현할 적절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인간의 사회적 존엄을 구현하는 행위 아닐까?
그럼에도 김현경의 책을 읽다보면,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자아를 말한다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일임을 알게 된다. 근대 이전의 인간됨을 보증했던 ‘명예’나 ‘체면’이 현대에서는 ‘벌거벗은 인간의 존엄’으로 대치되고, 실존주의로 대표되는 흐름 속에서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자아’로 환원되면서, 그야말로 ‘텅 빈 기표’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텅 빈 자아 앞에서 인간은 갈 곳을 잃고 배회하게 된다.
하지만 김현경에 의하면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 명예와 체면 대 벌거벗은 인간의 존엄을 대립쌍으로 배치하는 지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오랜 경구가 지시하는 바,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감각할 수 있는 자아라는 것은 실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감각하는 것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 감각 경험 속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있을 순 있어도, 그 상호작용 속에서의 감각 행위 자체를 진정한 자아의 오염으로 볼 수도, 볼 필요도 없다.
개인적으로 한국사회는 이제서야 “서로 간에 존중해야 할 거리”에 대해서 눈떴다고 생각한다. 개인마다 침해받기 원치 않는 선이 있는데, 그 선을 지키고 때로는 침해해도 적당히 모른 체 해주기도 하는 가운데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이를 구조적, 위계적으로 억누르거나 없는 것처럼 여겼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사회는 “진정한 나를 찾아 헤매는” 힘든 여행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진정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김현경은 “명예”와 “존엄”이라는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두 가지 큰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혹은 연결되어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인간은 사람 사이에서 인정되고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되고, 내가 되고, 나 또한 그렇게 ‘다른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가운데 작용할 때, 우리는 서로를 모욕하여 명예와 존엄 (혹은 인권)을 무너뜨리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명예와 존엄이 있는 ‘사람 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길은 조금은 다른 경로와 다른 풍경을 갖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