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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27. 2021

조경숙 <아무튼, 후드티>

책을 읽다 문득 내게 있는 후드티를 떠올려보았다.

지금 입고 있는 보라색 후드티가 전부다.


후드 티가 편한 건 알고 있지만, 그리고 심지어 저자와 비슷하게 학창 시절 판타지 소설에 미쳐있어 마법사들이 즐겨 입는 후드가 친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후드티는 불편한 물건이었다. 비나 눈이 오거나 겨울철 찬바람이 불 때가 아니고서는 후드를 뒤집어쓰지도 않았다.


후드를 뒤집어쓰면, 뭐랄까 세상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 속절없이 당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닥쳐왔다. 나에겐 후드는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발가벗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다만 최근에는 그런 불안보다 이어폰을 끼고 나만의 세계로 몰입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 자동차를 대신해 후드로 그런 공간을 만들곤 한다.




나에게 후드티가 그런 존재는 아니지만, 저자에게 후드 티는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때론 쪼그라든 자아를 숨기는 피난처, 때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 때론 어디서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무적의 치트키, 때론 느슨하지만 끈끈하게 서로를 연결하는 밧줄.


후드티를 둘러싼 저자의 이야기 대부분은 한 개인의 존엄을 여러 방면에서 옥죄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들춰낸다. 그 이야기가 여성이자 양육자이며 IT계열 종사자이자 만화 덕후인 저자의 일상에 기초하여 깔끔한 필체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분량도 길지 않고, 내용 또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군데 군데 곱씹어볼만한 것들이 참 많다.


남성으로서 섣불리 공감을 표하기에 조심스러운 지점이 있긴 하지만, 저자가 학교에서 겪은 일들이나 사회에서 다양한 경력을 오가며 '얕고 넓게' 살았던 이력들은 내 지난 날을 돌이켜 생각나게 했다. 마음을 주었던 친구의 꾐에 넘어가 하기 싫은 싸움을 하는 식으로 이용당하고, 늘 책과 공상에 빠져 살다가 이리 저리 고민하고 방황하며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후드에 대한 입장은 다르지만 나 또한 저자와 비슷하게 나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이 세상과 쪼그라든 나 사이에서 힘겨운 버티기를 해왔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후드티와 같은 무엇이 나에게 있는지 질문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나에게도 내 인생을 엮어 설명하게 해주는 무엇이 있는데, 내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아마 이 생각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저자인 '갱'을 처음 만났던 건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어느 모임에서였다. 첫인상은 해맑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임성있는 모습이었다. 그 땐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심지어 후드티를 즐겨 입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후드티를 주제로 책을 냈다고 했을 때도 살짝 의아한 정도였다. (내가 워낙 남의 외양에 관심이 없다.)


(잘한 일인지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글 속 '남편'과 다리를 놔주고 둘이 결혼한 이후,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렇게 책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저자를 만나니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맙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내 주위에 믿고 지켜보며 이따금 말 걸어볼 수 있는 동료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벼운 책으로 깊은 생각을 이끌어내는 책'을 써 준 것이 가장 고맙다. 저자의 지인으로서가 아니라 동시대 한국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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