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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를 둘러싼 몇 가지 질문들

by 엔틸드
예전에 취업을 위해 에세이를 냈는데,
다시 보니 참 열심히 (취업을 위해 ㅋㅋ) 썼다 싶어 올려봅니다.




#1. 순수한 ‘나’ 라는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해보자. 온전히 H2O 분자로만 이루어진 전해수처럼, 타인의 영향력이 조금도 미치지 않은 단독적이고 순수한 나라는 것이 있을까? 이는 철학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종교적인 질문이다. 오랫동안 종교인의 정체성을 우선하며 교회 공동체에 몸담아 온 바, 나에게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유래에 대한 질문을 다시 낳는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전달된 유전인자들로부터 조합되었는가? 다양한 대답들이 있지만 역사를 통틀어 그 대답에는 끝이 없다.

이쯤에서 질문을 바꿔 본다. 나의 유래나 순수하고 단독적인 의미의 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나’, ‘그냥 이렇게 되어진 나’라는 게 존재할까? 나는 그렇게 믿는 편이다. 어린 날에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명제에 감명을 받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다시 레비나스의 타자론에 의해 깨어졌다.

어느 순간 ‘순수한 나’를 찾는 모든 존재론적, 주체론적 물음들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내가 있다고 한들, 그것은 진정 고정된 실체일까? 진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어떤 종교인들처럼 그것은 또 하나의 맹목적인 믿음은 아닐까? 순수한 나라는 이데아적인 목표가 자칫 나 자신을 비롯해 타인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그렇게 돌고 돌아 확증되는 순수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래서 지금은, 조금은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나’를 찾고 있다. 유래가 어떻든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가 어떻든 그래서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는 정말 편안하게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에서 제공한 몇 가지 통속적인 틀 속에서 나조차 간편하게 자화상을 그리고 뒤돌아서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정말 내성적인 사람일까? 나는 정말 재미가 없는 사람일까? 나는 정말 끈기가 없는 사람일까?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타인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던지는 것들을 읽어내자 질문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저 형용사들 – 내성적인, 재미없는, 끈기 없는 등등 – 이 얼마나 타인 중심적인 의미체계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그에 맥없이 순응하며 살았는지 알게 됐다.




#2. 그러면 내가 알게 된 ‘자연스러운 나’는 누구인가?


언제나 나는 내성적인 사람으로 불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교회 공동체에서는 내가 놀랄 정도로 무대 체질이었다. 장난도 잘 치고, 서프라이즈 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좋아하는 꽤 밝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개그맨과 같은 재미는 갖지 못했지만 사람들과 함께할 때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남들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지만,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집중력을 발휘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고민에 시달렸다. 어딘가 ‘순수하게 나인 나’, 그것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아서 이렇게 뻔히 드러나는 양면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세상이 부여한 가치체계에서 내가 가진 것들은 늘 후순위였기 때문이다. 난 당연히 어느 한 쪽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이 두 가지 중 하나는 억지로 만들어 낸 페르소나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사회가 빌미를 제공하고 내가 스스럼없이 파고 들어간 이 악순환의 고리는 자아를 좀먹었다. 내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어느 정도 자아가 상처를 받은 뒤였다.

누군가가 내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해줬다. 명상이나 요가 등의 방법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먼저 귀를 기울이라는 것.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시작이었다. 호흡이 달라지고, 느낌을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부터 ‘자연스러운 나’로 관심이 옮겨갔다.

어릴 적 큰 감명을 받으며 봤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 그런 대사가 있다. “나는 단수 單數가 아니다.” 쉽게 말해 나는 하나의 성격이나 정체성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타인과 사회와 관계하면서 어느 정도 변하기도 하고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그렇게 모이는 것들이 기억, 추억, 경험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결국 ‘관계’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나’에게로 귀속된다.

내성적이면서 외향적이고, 재미없으면서 유쾌하고, 끈기없으면서 집중력있는 나의 모습은 어느 한 쪽을 포기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드러날 수 있는 나의 여러 모습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 큰 기둥이 있다.

그건 나는 민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닌 저 문장에 어떤 무게가 담겨있는지를, 불과 얼마 전에 깨닫게 됐다. 이 깨달음을 위해 거의 인생 전체를 바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이 질문을 안고 살았던 지난 10여년 간의 고민과 노력이 녹아들어가 있으니까.




#3. ‘자연스러운 나’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나의 다양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래 가지고 태어난 자연스러운 나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순간에 내가 어떤 자극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민감한 사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민감한 사람은 같은 자극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입력된 자극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고, 에너지를 더 많이 투여하고, 더 많이 긴장한다. 내가 딱 그렇다.

지금까지의 삶의 경험을 돌이켜보니 어떤 법칙같은 것이 보였다. 내가 자극과 긴장을 잘 정리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나타나는 나의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 단순하게, 좋고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나의 모습과 불편한 사람들과의 자리에서의 내가 완전히 달랐다. 전자는 자극이 적거나 긍정적이고 긴장은 거의 없으며, 후자는 자극이 많고 긴장의 강도도 높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민감한 나, ‘자연스러운 나’는 특히 더 잘 돌봐야만 하는 존재다. 때로는 어린 아이 같고 때로는 철없는 소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스스로 확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회가 민감한 사람에 대해서 어색하고 낯설게 여기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나를 돌보기 힘들기에 누구보다 나를 먼저 챙기려 애써야 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다.




#4. 세상이 말하는 나는 타자일까, 아닐까?


내가 나를 ‘민감한 사람’으로 발견하고 나를 돌보며 살아가려 해도, 여전히 사회가 나를 묶어놓는 기술과 방법은 많이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내가 느끼는 나를 “낯설게”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걸 어색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나의 욕망과 취향과 지향까지도 손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래서 그 사실을 깨달은 몇몇 이들은 사회의 모든 규정을, 이름붙이기 행위를 거절한다.

나 또한 이러한 거부감에 많이 시달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불특정다수의 존재들이 구성하는 세상이라는 개체는 개인에게서 최소공배수만을, 어디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요소만을 추출해서 전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가진 입체적이고 복수적인 특징은 고려하지 않고 가장 눈에 띄는 것 하나를 떼다가 그것이 그 개인의 전부라고 – 대놓고는 아니어도 –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놓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게 대중의 인간론이고, 대중에 속한 평범한 개개인도 모두 자신을 그렇게 단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세상이 말하는 나의 단면은 여전히 나의 일부다. 일부만 떼어다 아무런 복합적 구성없이 던져놓고는 하이에나의 먹잇감으로 삼아서 그렇지, 엄연한 나 자신이다. 세상의 시선에 오염되고 왜곡되었을지라도 그것 또한 나 자신이기에, 그런 나를 떼어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 낯선 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죽음’ 앞에 나를 데려가 보는 것이다. 자살을 시도하라는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불안감이 심할 때면 가끔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온 몸이 짓눌리는 듯 가위눌림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 온 세상이 찌그러져 나도 이제 곧 압사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고 나면 지금 내 심장이 제대로 뛰는 것, 몸이 살아 움직이는 것, 내가 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철학자 이매뉴얼 레비나스는 ‘내가 나를 타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으로 잠자리에서의 이런 경험을 꼽았다.




#5. 이런 세상에서, 공동체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스스로를 “지구인”으로 여기려 노력 중이다.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를 삶의 모토로 삼은 지 몇 년, 전 지구적 기후재앙이 현실로 다가오고 (현재 시점)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모든 환경의 변화들이 정말 나와 상관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를 새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찾고, 또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당연히 나만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정력을 쏟아부은 교회 공동체에서의 경험이 있었고, 그 후에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시절 나를 향해 때로는 격려로, 때로는 질책으로 힘을 주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내가 ‘자연스러운 나’를 찾으려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자연스러운 나’를 찾아 중심을 잡고, 그 중심을 바탕으로 한 홀로서기를 통해, 내가 결코 홀로 설 수 없음을 깨닫고 타인에게 ‘잘 기대기’ 위함이었다. 홀로 서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에게 ‘기댈만한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늘 홀로 서기 위해 애쓸 뿐이다. 하지만 홀로 선 사람은, 자신을 홀로 서게 하기 위해 사실은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붙들어 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얼핏 모순 같지만, 자연스러운 나를 발견하고 중심을 잡는 것은 곧 내가 타인과 온전히 만나 서로 안전하게 기대기 위한 하나의 스케치같은 것이다. 나를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위하여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는 힘이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누군가’를 해치고 있다면, 주저없이 ‘우리’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런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현재 속한 공동체가 관계에 있어서 갖는 모토는 ‘안전거리’와 ‘느슨한 연대’다. ‘안전거리’가 횡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느슨한 연대’는 공동체적 힘을 발휘하는 종적인 면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안전거리’가 있다. 친밀도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개개인에게 허용하는 안전거리가 달라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 내에서 안전거리가 침해당했을 때 침해당한 사람이 주저없이 그 사실을 밝히고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어야 하고, 침해한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전거리’에 있어 가장 큰 준칙이다.

동시에 그러한 일련의 행위가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장치들이 필요하다. 언어화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나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 ‘어떤 형태의 차별과 혐오를 배제하려는 열린 분위기’, ‘타인을 향한 배려와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적절한 균형’이 그 장치라고 생각한다.

‘느슨한 연대’는 그야말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함께하는 것이다. 함께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과도한 권리나 책임, 노동이 집중된다면 그것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인 평균화가 답은 아니기에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동안 함께해야겠지만, 그조차 때에 따라 유연하게 바뀔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가장 어렵고 지금도 잘 이뤄지지 않는 모토다. 공동체뿐만 아니라 업무조직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지향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렇게 될 때, 좋은 공동체가 제공하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얼마 전 공동체 사람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몇 시간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나를 향한 많은 찬사를 들었다. 그것은 칭찬에 익숙하지 못한 나에게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날 그 공동체의 사람들이 내게 보냈던 찬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관계하며 만들었던 서로의 모습을, 서로의 공로를 확인시켜준 것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패드백 안에서 나는 다시금 나를 발견하게 됐다. 비단 나만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의 존재를 확인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평생을 홀로 그리고 함께, 진정한 나를 향해 여행한다. 고 신영복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가슴에서 발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그것은 곧, 진정한 나를 찾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 길은 길 자체로 이미 목표점이다. 어느 날 문득 그 길 전체가 우리가 가고자 했던 바로 그 곳의 모양이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순간 순간 나로 살아가는 내가 곧 진정한 나임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나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길 가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살아있는 한. 그리고 좋은 그대가 함께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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