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틸드 Nov 12. 2021

백신, 네트워크, 서울공화국

(10월 29일에 처음 작성한 글입니다. 11월 12일에 술김에 마구 적어 완성했습니다.)


오늘 백신 1차 접종을 받았습니다. 2차도 아니고 1차라니, 남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거지요. 회사에 백신 휴가를 신청하고 잔여백신을 맞았습니다. 화이자로요.


저는 원래 백신을 접종받을 의사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백신 음모론자도 아니고, 코로나를 면역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자가치유 신봉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독감주사 같은 걸 맞아도 따끔한 주사가 무서웠지 그 뒤에 올 수도 있는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았을까요? 코로나 백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다만 개발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백신의 안정성, 그것을 유통하고 관리하는 체계, 무엇보다 만의 하나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보여준 정부와 의료기관의 무책임한 태도가 백신 접종을 망설이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직장에서 강권(...요?)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맞았습니다.


코로나 뿐만 아니라 백신 등 "의료 및 바이오산업"을 둘러싼 논란은 그 양과 깊이가 상당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우리의 건강 또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포섭된지 오래입니다. 몸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난지도 꽤 되었지만, 그조차 자본주의 생산/생활양식이 가하는 압력을 견디고 억제하기에는 여전히 소박한 모습일 뿐입니다. 


다국적 제약회사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팬더믹 상황에서조차 각 국가를 상대로 불공정한 계약을 요구하고, 국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빛좋은 개살구 신세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국가가 살리려 애쓰는 바로 그 대상"인 국민국가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백신을 러시안 룰렛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긴급승인된 백신에서 예상보다 더 높은 확률로 심각한 부작용이 생겨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국가는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순순히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의 사후관리에는 전혀 대응하지 않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맞는 게 훨씬 이득이다"라는 수십년 전에나 쓰이던 논리로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그리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실은 하나의 톱니바퀴만 어긋나도 전체가 멈춰버리는 무서운 중앙집권적인 살얼음 위를 걷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벌어진 KT의 네트워크 오류 사태, 그리고 오늘 비슷한 네트워크 문제로 (11월 12일) 발생한 지하철 연착 운행 등은 우리가 편리와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네트워크 테크놀로지로 대체한 비극적인 결과입니다.


분명 초창기 네트워크 기술이 꿈꾸던 세상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세계였습니다. 지금의 세계는 일견 그 꿈이 이뤄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물질적인 기반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전체가 붕괴되어 버리는, 전혀 다원적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폐쇄적인 체계에 갇혀버린 중앙집권적 체계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망 중립성, 네트워크의 공공재 담론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실상은 중앙집권적인 네트워크가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버리면서 지금의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주저앉고,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스스로 가라앉아도, 지금의 자본주의 기반 문명은 그러한 재난을 원천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국적제약회사가 만든 백신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코로나19의 감염된 것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 또한, 저 거대한 재난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그 매커니즘과 동일한 매커니즘의 희생자입니다.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병폐 또한 이 중앙집권적인 살얼음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서울공화국, 다시 말해 지방 소멸 위기입니다. SNS를 보다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최근 점증하는 지진에 대해 서울에 지진의 여파가 미쳐 창문이 살짝 흔들리면 그것만으로도 난리가 나지만 지난 번 포항 지진과 같이 한 도시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재난이 닥쳐도 서울의 작은 지진만큼의 관심을 받기 어렵습니다. 몇년 전 발생한 강원도 산불도, 언론의 보도 행태나 SNS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인식을 살펴보면 서울공화국적 인식이 얼마나 심각하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은 결코 의식주를 자급자족할 수 없는 도시입니다. 전력, 도시가스, 식품, 의류, 무엇하나 서울 안에서 생산하여 소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일국의 수도로서 가장 많은 인구와 절대적으로 앞선 인프라를 자랑합니다. 이것이 지방으로부터의 공급이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생활하는 서울시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후위기 아니 기후재난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적인 장벽으로는 가로막지 못하는,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지구 위의 생물들에게 존재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더믹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 글을 코로나 백신으로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맞고 후유증을 견뎌야 하는 그 백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다보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중앙집권적 살얼음 위에 서 있는 우리의 문명이라는 본질입니다.


네트워크의 붕괴나 서울공화국은 어쩌면 이러한 본질을 투영하는 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알게 모르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그것도 하필이면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망 중립성 실현과 네트워크 시스템의 공영화든, 지역 균형 발전이든,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주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이번 백신 접종을 통해 이 사실을 한층 깊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일하는 그 모든 생활을 둘러싼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언제든 나라는 한 개인은 어떤 시스템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바꿔 말하면 그런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비롯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 또한 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이 험한 시절을 견디며 뼛속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전문 정치인 하나를 키워내지 못하고 외부의 저열한 인사들을 끌어다가 권력놀음에 취해 있는 지금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전환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소박한 생디칼리즘(노동조합주의)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이제 우리의 일상 그 자체이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것이기에, 내 소박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장대한 투쟁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나 떠들기 시작할 때, 백신도 네트워크도 서울공화국도 지금과는 조금은 더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 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비판을 했다는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