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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제주 (1)

by 엔틸드

이번의 출발


안정적인 노동조건이 주는 안정감은 비단 직장생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휴식에도 안정감을 준다. 이번 여행은 그 안정감에 기대어 6월부터 일찌감치 계획되었다.


한창 격무에 시달릴 때면 누구나 될 것 같지 않은 상상을 하며 현실을 도피하고 숨 쉴 구멍을 만든다. 내게 떠오른 건 또 한번의 제주 여행이다. 여행으로는 첫번째 방문이었던 2016년의 좋은 기억을 마음 한 켠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여행을 하자는 막연한 상상속에서 그 섬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IMG_0021.jpg 2016년 이맘때 갔던 제주 바다.

안정적인 노동조건을 믿고 일찌감치 날짜를 잡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했다. 자세한 과정을 설명하니 여행 내내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 뷰맛집을 운영하는 지인은 놀라며 나를 "지독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왕 쓰는 귀한 휴가라면 치밀하게 계획하고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야지!


너무 더운 여름에 휴가를 가는 걸 싫어한다. 몇십년간 나를 살펴 얻은 결론이다. 휴가란 무릇 뜨는 해와 지는 해가 바깥의 나를 너무 괴롭히지 않는 계절에 비바람이 심술을 덜 부리는 시기를 골라 휘뚜루마뚜루와 칠랄레팔랄레를 적당히 섞어 보내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낙점된 계절이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시기와 장소는 태풍이 올 가능성이 비교적 낮은 제주도였다.


MBTI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J와 P의 분류에 대해서는 조금 납득하는 바가 있다. 둘 다 계획을 세우지만 돌발변수가 생겼을 때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뉜다고. 그 분류에 따르면 나는 J에 가깝고 실제로 J로 나오는 사람이라, 혼자 가는 여행임에도 돌발상황에 힘들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미리 적어놓고 최대한 하루 단위로 실현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정리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걷기, 산책하기, 공연 보기, 맛집(카페 포함) 가기, 나에 대해 쓰기, 좋은 사람 만나기, 아침저녁 스트레칭


쓰고 보니 모두 내가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겠구나, 힘 주지 말고 그냥 소소하게 살다 오면 되겠구나.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말마따나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이니까. 나도 그 말에 백 번 동의하니까. 그게 어디든 낯선 동네를 걸어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여행이 갖는 흔한 모양에 갇히지 않고 가볍게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또 있다. 휴가날이 다가올수록 왠지 모르게 지금 살고 있는 집조차 내 집 같이 여겨지지 않고 (법적으로 실제 그렇긴 하지만) 어디에 있든 나의 집이 아닌 듯, 조금은 외로우면서도 자유로운 듯한, 떠다니는 듯한 감정이 커져갔다. 평소라면 나를 불안하게 했을 감정이지만, 이 때는 왠지 홀가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 안에서 끊어진 건 족쇄일까, 항구에 나를 머물게 해주던 밧줄일까?


두 번의 제주


제주도는 2016년에 처음 간 게 아니었다. 첫 방문은 십 년도 더 넘은, 그러니까 강정의 구럼비가 폭파된 직후였다. 강정해군기지건설을 막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나선 발걸음의 끝에서 "강정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후 몇년 간 나에게 제주도는 고통과 슬픔의 땅으로 남았다.


이 노래가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불렸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픔만 남은 건 아니었다. 내게는 사람이 남았다. 그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드디어 2016년 처음으로 여행을 목적으로 제주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심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답게 딱 왕복 비행기 티켓 비용정도만 손에 들고 있었고, 숙식도 아는 동생 집에서 신세를 졌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상황도 되지 않았고 딱히 계획도 없이 갔던지라 하루 종일 이곳저곳 걸어다니기만 했다.


IMG_0031.jpg 2016년 올레길을 걷다 만난 말 친구.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안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제주도의 첫인상으로 남은 건 동네 애월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해안을 따라 하염없이 걷던 그 시절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어디쯤이었고, 섬 답게 변화무쌍한 날씨가 내 발걸음에 여러가지 색채를 더해주었다. 맑은 하늘을 휩쓸고 지나는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거세지면 내놓고 말리던 무화과를 걷어가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만해도 드문드문 있던 카페는 비에 젖은 여행자가 잠시 쉬어가기 좋은 장소였다.


햇살과 빗물이 뒤섞인 수풀과 흙 사이로 바다를 품고 불어온 바람이 지나면, 섬에서 맡을 수 있는 독특한 바다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런 채로 걷다보면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걷고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제주라는 섬의 모습처럼, 그렇게 영원히 걸어도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 번째 제주도 내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 그 인연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중 한 분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마침 애월에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던져지고 결국 혼자만 걸어야 하는 길을 가기에 고독을 떨쳐낼 순 없지만, 그래도 맞닿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와닿는 마음들이 세상을 알록달록 색칠한다. 두 번째 제주도 그 냄새와 빛깔이 여전했다.


첫번째 제주의 기억 위에 새로이 새겨진 기억이 있다. 가을 제주가 펼쳐주는 해질녘의 풍경이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산 너머로, 바다 끝으로 가라앉는 해를 볼 기회가 많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던 순간이 누빔점이 되어 여행이든 일상이든 가리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덕분에 지금이 여행인지 일상인지, 그런 경계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4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20220929_184353_HDR.jpg 해질녘 가을의 제주.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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