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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날

by 엔틸드

여러분은 언제 술을 드시나요?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제 프로필 사진은 이 포스트 배경사진에 등장하는 막걸리의 캐릭터를 찍은 겁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몇년 전부터 밥을 먹으며 술을 곁들이는 반주를 즐기게 됐어요.


어떤 이가 반주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술꾼 - 혹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 이라고 하던데, 그렇지 않아요. 저는 술꾼이 아닙니다. 단언하는 이유는, 제 주변에 진짜 술꾼이 있기 때문이죠.


그의 말에 따르면 술은 기쁠 때 슬플 때 화날 때 행복할 때 마셔야 하는, 아니 마실 수밖에 없는 필수적 존재입니다. 삶의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념하는 행위의 매개체가 바로 술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아요. 힘들면 질릴 때까지 잠을 자고, 기쁘면 집에서 혼자 노래를 틀어놓고 깨춤을 춥니다. (아쉽게도 인생에는 전자의 비율이 너무 높네요.)


그럼에도 제가 반주를 한다고 하면 다들 술을 좋아하나 보다, 무슨 술을 좋아햐느냐, 고 묻습니다.


뭐 술을 좋아하는 건 부정하기 힘들겠네요. 자주는 아니어도 집중적으로 생각나 찾는 때는 분명 있으니까요. 주종에 있어서도, 호불호가 확실한 제 성향상 맥주보다는 소주, 와인보다는 막걸리, 고량주보다는 양주 (? 어라?) 를 좋아합니다.


막걸리는 제가 성지처럼 여기는 어느 곳에서 전국의 좋은 막걸리를 마신 후 팬이 됐고, (죄송하게도 저는 ㅈㅅ 막걸리는 막걸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 ㅈㅍ 막걸리는 돼야죠.) 소주는 다들 많이 마시는 ㅊㅇㅅ이나 ㅊㅇㅊㄹ보다는 최근 나온 ㅂㅎ 소주를 좋아합니다. ㅊㅇㅊㄹ 글씨를 쓰신 그 분이 제 사상적 지주이시지만, 맛은 엄중한 거니까요 흐흐 'ㅅ'


사실 양주는 잘 마시지 않는 편이긴 한데, 예전에 바카디라는 양주를 샷으로 한 번 먹어봤다가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감명(?)을 받은 뒤로 마셨던 진 헨드릭스가 제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그걸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중입니다. (라곤 해도 심각하게 비싼 편은 아닌지라 금방 살 수 있을 듯....?)



술 마시는 날이라.


사람들과 술을 마시려고 하면 술 마시는 날은 대충 정해져 있죠. 만나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맞을 때, 맛있는 식당에 가서 술을 곁들이거나, 경치 좋은 공원이나 한강 같은 곳에서 맥주 한 캔을 기울이거나, 비가 추적추적 (폭우는 절대 안됩니다.) 오는 날에 소주/막걸리잔을 기울이거나.


하지만 혼자 술을 마시는 날이라고 하면 좀 더 경우의 수가 많아집니다.


먼저는 정말 순수하게 술이 땡기는 날. 아무 일도 없었지만 왠지 오늘은 소주가, 맥주가, 막걸리가, 하여간 뭐든 술이 땡기는 날. 그런 날은 술을 정하고 안주처럼 먹을 밥 반찬을 정하죠.


둘째는 분명한 계기가 있는 날. 주로 힘든 프로젝트같은 걸 끝낸 직후라든지, 힘든 인간관계의 한가운데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든지, 정말 기쁜 일이 있어서 절대 그냥 보낼 수 없는 날이라든지. 최근 술을 펑펑 마셨던 날이라고 하면 5월 9일 우리 오마이걸의 지호가 탈퇴한 날이네요. (배우 공지호로 거듭난 지호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하나 더 있어요. 딱히 술도 땡기지 않고,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술을 찾게 되는 날. 그냥 오늘 같은 날이라고 하죠. 오늘은 별 일은 없었지만 왠지 텐션이 떨어졌고, 그러다 어제 사놓은 소주가 생각이 났고, 그래서 소주와 커피 원액을 섞은 작품에 마파두부밥과 ㅂㄱㅋ 치킨 사이드 메뉴를 뒤섞은 해괴한 조합으로 반 병 정도를 비웠습니다.


이런 날, 별 일도 없고 술도 땡기지 않았지만 술을 마신 날은 마치 별 생각없이 놀이동산에 가서 무표정한 얼굴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온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낍니다. 내 안에서 뭔가 굉장히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나만 그걸 모르고 있거나, 애써 모르고 싶어하는 내가 술을 찾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술을 통해서라도 내 안의 나와 만나고 싶어하는 듯한 하나의 몸부림 같은 것.


이럴 땐 조용히 침묵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데, 이 공간에 마치 술 한 잔 비워내듯이 마지막으로 비워내고 나서 침묵하고 싶었나봅니다. 한동안 너무 이 공간을 비우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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