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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의 기록

by 엔틸드

비가 펑펑 쏟아지던 날, 오랜만에 쐬주가 먹고 싶었다. 빗소리를 안주삼아 라면 국물과 함께 쐬주를 넘기는데, 캬 그 감칠맛이란! 15년째 노동자 임금 동결한 쓰레기 회사의 쐬주가 아니라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한 병을 비웠는데도 너무 거뜬하여 놀란 채 까무룩 잠이 들었지만, 깨니 머리가 아팠다. 아니 숙취라니! 술 잔뜩 먹은 다음 날 몸이 거뜬하면 오히려 당뇨 위험이 있다던 어떤 기사를 곱씹어 해장을 하려 했지만 물질이 들어가야 했나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며 어제의 숙취를 사무실 동료들과 나누었더니 모두 안타깝고 가여이 여겨주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해장을 위해 순대만 넣은 순대국을 먹었고 속이 풀리는 듯 했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심지어 커피를 마셨는데도!


사실 두통의 원인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전날의 숙취는 방아쇠였을 뿐, 두 달 정도의 격무로 인해 소진된 체력과 "세상 짐"이 더 큰 배후세력이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우크라이나 침략이 격화되면서 물가는 오르고 자본주의의 첨단은 끝의 끝으로 달려가는데, 세상과 내 주변 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가족이 아프고 어찌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오랜만의 여유로움 속에 햇살보다 조도가 낮은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보는 다크모드의 SNS에서는 불안과 두려움과 한숨과 분노가 여기저기서 묻어나온다. 언제나 늘 그렇게 시계추처럼 똑딱똑딱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가운데 내게 필요한 건 똑 과 딱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결정이다. 그래서 오늘은 세상 짐을 진 술에 쩐 몸을 이끌고 부러 먼 길을 돌아 걸으며 집을 향했다.


집 앞 지하철역을 내리며 오늘은 샌드위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발견한 괜찮은 샐러드집에서는 수박주스도 만들어 팔았다. 나 분명히 어제였던가 모니터 너머 예쁘게 잘린 새빨간 수박을 보며 오랜만에 과일에게서 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는데 말이지.


샐러드와 수박주스를 들고 향하는 골목을 뒤덮은 하늘에는 누군가 찢어 흩어 놓은 각양각색의 솜사탕이 뿌려져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천천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저렇게 솜사탕인 듯 시냇물인 듯 보이는 구름을 만든 존재는 분명 자연일 것이다. 자연이 아니고서는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없으니까.


책임감 때문이든 정의감 때문이든 세상 짐을 미처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맥락의 세계로의 여행이 필요하다. 그것도 날마다 필요하다. 숙취에 시달리는 나를 걱정해 준 동료들, 길가에 놓인 커다란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혀를 내밀지 않고 있던 견공 두 마리,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저녁 노을 아래로 흐르던 이전보다 덜 꿉꿉하고 시원한 바람까지. "내가 늘 쉽게 놓치는 작고 아름답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순간들을 기억해야지." 오늘은 그 어느때보다도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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