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그 자체가 탄력적이라서, 똑같이 먼 과거라 해도 어떤 과거는 이야기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고 어떤 과거는 침묵 속에 묻혀 있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이 낮이라면, 그 영역의 끝은 황혼이다. ... 시간 그 자체가 불확정적이라서, 똑같이 먼 과거라고 해도 어떤 과거는 이야기가 되어 가까워지고 어떤 과거는 그냥 침묵 속에 묻혀 있다. ... 트라우마는 침묵의 형태로 대물림된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법을 알게 되기까지 몇 세대가 걸릴 수도 있다.
최근 아일랜드의 역사와 그 종교성에 관심이 생겨,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리베카 솔닛의 <마음의 발걸음> ( A Book of Migrations)을 다시 들췄다. 10.29 참사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는 종교인들의 집회에 가는 길에 이 부분을 읽게 된 것 또한 신의 뜻일까?
아일랜드는 1842년부터 1852년까지,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엄청난 기근에 시달렸다. 가난으로 인해 주식으로 삼던 구황작물인 감자가 병으로 인해 황폐화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진짜 원인은 사회정치적 구조에 있다고 말한다.
이 기간동안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졌지만, 아주 소수일 뿐이었다. 오히려 대기근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떠든 세력은 권력집단이었고, 깊은 상처를 받은 대다수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침묵 속에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미 그러한 역사적 상흔이 시간과 장소에 무수하게 박혀 있지 않은가? 광주에, 제주에, 바다 위에, 그리고 이태원에 말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 대목에서 이야기의 힘에 대해 말한다.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행위는 장르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사건을 현재로 소환하고 해석하여 접하는 이의 반응을 요구한다.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과거와의 대화이자 미래에 대한 모색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각자의 인생 속에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나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에 특별한 고유의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수많은 미시적 역사들이 관계맺고 얽히는 가운데 인간 역사의 총체가 구성된다.
촛불을 들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내 역할은 노래하는 것이었다. 기도와 탄원과 선언과 투쟁의 다짐이 오고 가는 가운데, 며칠 전 급하게 부탁을 받아 노래하기 직전까지 선곡을 고민했던 나는 첫 곡으로 모두의 행복과 평안을 비는 노래를, 두 번째 곡으로 이 참사의 현장에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바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의 집회가 끝나고 촛불을 든 사람들이 걸음을 옮긴 곳은 참사의 현장이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다가가지 못했던 바로 그 곳, 온갖 슬프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우성치고 있을 그 곳에 얼떨결에, 하지만 다행히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할 수 있었다.
상점은 영업을 하고 있었고 노래도 흘러나왔지만, 주변은 팽팽한 긴장감이 붙들고 있는 듯 한산했다. 침묵 속에 줄지어 천천히 현장을 돌았다. 그 현장에서 아우성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많은 이들이 놓아둔 물건들과 글들 덕분이었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그 곳에서는 평안해라 는 문구와 함께 BTS 포토카드, 캔커피, 과자가 놓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매우 부조화스러웠다. 거기에 놓여 있을 메시지와 물건들이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참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골목을 지났다면 놀랄만한 광경이다.
내 마음이 움직인 건, 뭔가 뇌리를 퍽하고 때린 느낌을 받은 건 그 때였다. 신문 기사나 SNS에서의 타인들의 성토가 아니라 색채를 가진 이야기로 내게 살아들어온 순간이었다. 희생자들이 한 명의 인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고, 말도 안 되는 죽음이라 몇 배로 안타깝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노가 치미는 순간이었다.
유족의 동의 없이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했을 때 그들이 댄 핑계는 외국의 사례였다. 실제로 외신은 참사 직후 몇몇 유족들과의 인터뷰를 기사로 내보내기도 했고, 소수의 국내 언론 또한 그러한 추적 작업을 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과연 희생자 전체의 이름을, 그것도 유족 전체의 확인과 동의 없이 공개하는 행위가 외신의 후속 취재와 같은 결인가? 그렇지 않다. 이름을 공개한 세력이 어떤 옛날 습관에 빠져있어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생자의 이름을 드러내어 사건을 가시화하겠다는 행태는 사태의 맥락을 무시하여 오히려 해결에 악영향을 주는 멍청한 작태일 뿐이다. 10월 29일 그날 죽은 이들은 열사가 아니다. 희생자다.
희생자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잡아먹혀서는 안 된다. 증언은 어떤 세력이 조직하고 구성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유족이, 친구가, 지인이, 그 자리의 목격자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그들과 거리가 있는 우리에게 전해줄 때 증언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언론이 할 일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보도윤리에 어긋남 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제부터라도 본인들이 할 일을 잘 찾아보길 바란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직과 의석 수 모두를 가져갔음에도 그 몇 년 사이 책임자 처벌과 제대로 된 진상규명조차 하지 못했던 무능력한 거대 야당이 지금에 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