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7일, 4년 전 오늘 썼던 글.
얼마 전 출소한 안희정, 한국 남자, 그리고 나를 향해
이 글의 메시지를 다시 되새겨 본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권력을 strength와 power로 나눈다. 굳이 말하자면 전자는 권위에 가까운 비가시적인 것, 요즘 회자되는 말로는 '위력'이 되겠고 후자는 물리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IMF 시기를 지나며 "고개숙인 남자" 레토릭이 사회 전반에 뿌려졌다. 산업 역군, 가정의 경제 수호자인 남성들이 사회 속에서 겪는 일들로 인해 "가장의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거다. 그런데 이런 정서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한국사회 전반을 흐르는 권력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병영사회, 독재체제 하에서 강화된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위력이 폭로되어 폭력이,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권력이 가시적인 권력이 되는 순간 자신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인식하는 정서"다. 독재정권은 적어도 겉으로는 자신의 폭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해서 감춘다. 아버지는 평소에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국가답게) 가장답게 구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게 "무너졌다고 인식하는" 순간이 있다. 약자에게 폭로당했을 때다.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가장이 사회에서 가해지는 다양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다. 권위가, strength가, 위력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아니 국가는, 아버지는 그렇게 인식한다.
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드러났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것이 엄청난 힘이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국가와 아버지에게는 "폭로만으로도 권력이, 권위가 무너졌으니 나는 이제 권력도 권위도 없는 불쌍한 존재이고 그러니 이제 나를 다시 우쭈쭈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는 "무기"가 남았다. 오늘날의 국가? 아버지? 아니 대다수의 남성들? 모두 그 무기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안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모두 이 무기에 당하고만 있었다. 늘 아파왔던 사람이 아프게 된 사람 맘을 안다고, 그 든든했던 아버지의 어깨가 이제는 초라해보이는 것이다. 모두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빠 힘내세요"를 부른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의 카르텔 - 반드시 개개인의 연합이나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건 아니다. 암묵의 정서적 동조도 포함된다. - 은 자신들을 추스리고, 역공에 나선다. 시위를 해도 현행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정도면 여성상위시대 아니냐, 남자도 힘들다 ...
이제는 시대가 정말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거짓 울음에, 징징거림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의 움직임이 거세면 거세질수록 이 사회를 뒤덮고 있던 거대한 위력과 권위와 폭력의 거미줄같은 카르텔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위력'을 지닌 안희정이 무죄판결을 받고, 여성 피해 당사자가 죽든 말든 아니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을 즐기면서 불법영상의 거대 경제 카르텔은 오늘도 열심히 돌아간다.
정말 웃기는 건, 이 사회의 많은 남자들이, 접착제로 발라 붙여놔서 이게 원래 붙어있는줄로만 알았던 삐죽삐죽한 철갑을 벗기려고 하니까 그게 아프다고 죽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겠지. 생살에다가 접착제로 발라놓은 걸 떼내려고 하니까, 이거 내꺼 같은데, 내 권위 같은데 떼내려고 하니까 아프겠지. 그 철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고통받고 죽어갔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안희정 판결을 두고 침묵하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안희정 재판에서 부정당했던 '위력'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들 판단으로는 정세를 보아하니 아직 어떤 위력 앞에서 침묵하는 걸로 얻는 이득이 더 클 것이다. 위력을 부정함으로써 위력에게서 이득을 얻는다.
"이게 나라냐?"며 촛불을 태웠던 이들, 끝까지 폭력의 비사용을 주장했던 많은 이들이 한 것은 "위력시위"였다. 엄청 많이 모여서 "나에게 이 정도의 힘이 있고 이런 의사가 있으니 이 권위 앞에 반응을 보이라."는 게 민중이 할 수 있는 가장 즉자적인 시위의 형태이다.
몇년 전부터 그래왔듯, 이제 이 사회는 새로운 위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동료를 부르고 뒤쳐진 자를 일으켜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안희정의 위력을 부정했던 이들은 이제 새로운 위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위력을 응원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위력이라는 느낌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