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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5. 2019

당신들 자신의 손으로

(배경출처 : 시사인 온라인 기사 '콘크리트 지지층’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지영 그림)


2016.11.30


시사인에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이라는 책에 대한 장정일 소설가의 리뷰가 올라왔다.

그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최현숙 저자가 할배들을 만나며 분석한 바, "이들은 ...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시선과 평가를 좇아서 그걸 자기 정체성으로 내면화한다 ... 자기 계급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택들, 자기 허상화, 이런 현상이 나오는 거죠." 라는 분석에 대해 "진보 좌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게 없다."고 평한다.

최현숙 저자의 분석을 보며 "아 내가 잊고 있었던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여기 있었구나!" 하며 무릎을 탁 쳤던 나로서는 시선이 모아지는 지점이다. 장정일은 급속한 경제 성장의 끝에 놓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기능인들의 세계관을 '장인적 세계관'으로 명명하며, 그들의 세계관을 세뇌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장인적 자긍심으로 새로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자긍심과 기술을 사회적으로 환원하고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정일의 지적에 일견 수긍하게 된다. 내가 '좌파'라서 그런지 (물론 딱히 좌파의 어느 지점에 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구좌파와 신좌파 어디 쯤에 있는 자원에 많이 빚지고 기대어 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최현숙의 지적이 전형적인 좌파의 계급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장정일의 지적은 좌파가 놓친 지점 그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예전부터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하게 박정희를 찬양하고 종북과 빨갱이를 척결하자고 소리높이는 노인층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윗사람들이 잘 해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들이 당신들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주장은 일단 정치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모색할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최현숙이나 장정일이나 비슷한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층위를 단순화시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분석적 접근을 시도할 때 피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러한 오류를 일정정도 감수하면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게 분석의 숙명이긴 하다. 노인층이 콘크리트처럼 확고하고 단단한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표출된다'는 점은 양날의 검과 같은 측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장정일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더욱 더 "이 성취는 당신들의 손으로 이룬 것이다"라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잘못한 것 없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당신들의 노력을 모두 강탈해 간 이들, 그들로 인해 망가진 나라, 이것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장정일의 논지를 역으로 놓고 보면, 노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그 '장인적인 신념'에 따라 윗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그들도 - 특히 박정희도 - 열심히 정직하게 나라를 위해서 일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놈들이나 깡패새끼들은 모두 처단당하지 않았는가. 자기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지, 말끝마다 불만 투성이인 빨갱이들이 판을 치는 공산주의 사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의 굴곡에 강력하게 새겨진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세계관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광장의 타오르는 횃불을 경험한 지금의 세대가 확고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를 갖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세대가 모두 물리적 소멸을 맞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그들을 알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도 흑백이 아니라 총천연색이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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