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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9. 2019

"노점상"은 잘 벌면 안되나요?

2009년 12월 18일, 마포구청이 신촌 그랜드마트 앞 노점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 노점상 상인이 행정대집행 용역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항의의 차원으로 물건을 엎었다.




얼마 전 페이스북 페이지에 이런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연출된 화면처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장면입니다. 제가 이 사진을 보게 된 건 상가세입자의 권익보호를 위해 일하는 지인이 댓글을 달았기 때문인데요, 다른 이들의 댓글을 보니 지인이 댓글을 단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임대료 내고 영업하는 자영업자들은 호구냐, 세금도 안내면서 도로 불법점유해서 벌만큼 버는 사람들이면 세금이라도 제대로 내든가" 이게 부정적인 댓글의 대부분이었고, 노점상 관련 온라인 여론을 몇 년간 살펴본 결과 이것 외에 달리 덧붙일만한 주장은 없었습니다.


지인 댓글의 핵심은 "노점상을 규정은 하고 있지만 그에 관련한 뚜렷한 법령이나 관리 제도, 노점상의 권리와 한계를 명시한 법률 조항이 없는 상태다.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의지하는 실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국가법령센터나 국회법률정보시스템 등에서 "노점"이라고 검색한 결과, 노점상 권리에 대해 명기한 조항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대중이 가지고 있는 노점상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에 무책임한 행정조치가 더해지면서 사진과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점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영업의 형태입니다. 한국사회에서도 노점은 오래전부터 친숙한 존재죠. 여전히 어린시절 길을 가다가 핫도그, 샌드위치, 떡볶이, 닭꼬치 등을 사먹는 경험을 한번쯤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노점은 "도시미관을 해치고 질낮은 식품을 판매하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짐작컨대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정부의 태도가 명확해진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노점이 단속 대상이 되고, 대중의 인식도 부정적으로 바뀌어 가며, 경제 구조가 변화하면서 급격하게 그 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정부기관에서 노점에 대한 명확한 법률적 관리 방안을 수립하지 않고 방치했듯이, 대중의 인식 속에서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중의 인식을 자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른바 "벤츠 타는 노점상"이죠. 이 때까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어렵사리 장사하는 줄만 알았던 노점상이 알고 보니 억대 부자가 되어 벤츠를 몰고 다닌다는 겁니다. 대중은 여기에 배신감을 느낍니다. 마치 "길거리에서 먼지묻은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줄만 알았던 노점상 주제에 벤츠를 타고다녀? 이게 말이나 되냐?"고 말하는 듯이요.


여론은 급격하게 싸늘해집니다. 배고플 때는 가볍고 친숙하게 이용하는 가게이지만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을 때는 도로를 무단점유하는 불법세력이 되고, 추운 겨울 하루 종일 고생하는 노점상 아주머니는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그런 아주머니가 억대 부자에 벤츠를 몰고 다니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편의적이고 양가적인 대중의 인식 속에 노점상은 "세금도 안내면서 도로 불법점유해 억대 부자가 되어 벤츠를 몰고 다니는 파렴치한 상류층"이 되어 버립니다.


노점상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분노하는 이들을 볼 때면 늘 들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노점상은 잘 벌면 안되나?" 노점상에 대한 보호, 관리, 법적책임 등 어느 것 하나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어떤 이유로든 노점을 택하고 영업을 했는데 큰 매출을 올렸다면, 그건 그 노점상의 능력 아닌가요? 박수치고 본받으며 "긍정 & 도전정신으로" 노점으로 벤츠타는 비법을 배워야 옳지 않을까요? 능력이 좋아 큰 돈을 벌었으니, 부정한 방법으로 로비해 가며 금품을 횡령하는 범죄자의 길보다 백 배 정직하고 깨끗한 길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자유민주주의사회"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노점을 선택하고 능력에 따라 이익을 취하는 건 정당한 행위 아닌가요?




사람들은 타인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규정지으며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A 유형이야. 이 사람은 B 유형이네. 등등으로요. 그러한 유형화, 분류하기, 정체화하기는 넘쳐나는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뇌라는 기관이 갖고 있는 편리하고도 혁신적이며 중요한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가끔은 뇌를 괴롭히더라도 그러한 "경로의존성"을 벗어나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운동으로 이제 한국 사회도 도전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미투 metoo"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한 쪽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쟤는 피해자라는 애가 왜 이제 와서 저래? 그 때 당했으면 그 때 얘기했어야 될 거 아냐?" 혹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얘기하면서 왜 저렇게 담담해? 저거 꽃뱀 아니야?" 이러한 시선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피해자다움을 주장하지 말라"며 맞섰습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가동시키는 뇌의 정체화 과정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사고, 발화, 행동의 유형을 대입해서 바라보게 하고, 거기에서 어긋나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른바 "~~다움"을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하나의 사건, 한 명의 인생을 단순화해서 고통을 증폭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노점상도 마찬가지이고 나아가 성소수자, 난민, 장애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언론, 지인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받아 안게 된 몇 가지 인상이 조합되어 만든 누군가에 대한 "~~다움"이 우리 안에서 필터링 없이 작동할 때 그것이 그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을 한국사회는 맞이했습니다. 다음에 노점상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저부터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봐야겠습니다. "노점상은 잘 벌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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