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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y 12. 2019

기안84의 청각장애인 비하

* 이 글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우연히 벌인 논쟁 끝에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빡쳐서 쓰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라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에서 정리하겠지만, 이러네 저러네 씨부리는(...) 사람들은 평소 얼마나 깊은 식견으로 장애인 관련 문제를 생각해왔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60797


문제가 된 기안84의 만화는 네이버 웹툰에 5월 7일에 업로드 된 <복학왕> 248화 '세미나 1' 편이었습니다. 기안은 여기에서 핫도그를 사먹는 한 여성 청각장애인의 대사를 소위 v'혀 짧은 소리'v라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실제 음성 및 생각하는 문구까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항의가 빗발쳤고, 현재 해당 화의 대사는 수정되었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좀 어이없는 이의제기 몇 개를 보았습니다.


#1. "왜 유독 기안84만 가지고 그러느냐? 장애인 소재 영화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안하더니?"


장자연 사건을 두고 "그 동안 인권단체는 제대로 활동이나 했냐?"고 묻던 한국 남성들이 생각나는 지점입니다. <7번방의 선물>, <말아톤>, <오아시스> 등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매체에 대해서 장애인 관련 단체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분석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영화평론지에서라도 문제제기는 꾸준히 있어 왔죠.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물론 인권담론이 이제야 대중에게서 논의되기 시작한 한국의 후진적인 상황, 언론의 직무태만도 큰 몫을 하긴 했지만요.


#2. "작가의 의도, 맥락을 따지지도 않고 비하라고 욕부터 하냐?"


작품을 보시면 알겠지만, 적어도 그 회차에서 여성 청각장애인의 역할에서 대사의 어눌한 발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0"입니다. 여성이 핫도그를 사먹다가 사건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주인공 무리와 싸움이 벌어지는데, 여성이 "잘 듣지 못한다"는 설정은 중요하게 작용할지 몰라도 여성의 발음은 어떤 계기로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기안84가 "의도와 맥락을 고려해서 대사를 그렇게 처리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작가로서의 기본 자질을 의심하게 만들 겁니다. 설령 그 발음이 중요한 계기로 사용됐다 해도 문제가 되었을 상황이니 말이죠.


게다가, 혼자 보는 일기장이 아니라 대중을 향해 공개되어 그것으로 수익을 얻는 대중매체에서는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독자의 반응'도 중요합니다. 평소에는 '페미 영화는 믿고 거른다'며 '독자의 반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사람들이 이럴 땐 갑자기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다니, 감독이 '이것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닙니다'라고 의도를 전해도 별점테러 등 수난을 당하고 있는 영화 <걸캅스>는 안드로메다에서 상영하는 영화입니까?


솔직히 더 할 말이 있어도 해주고 싶지가 않네요. 정작 알아먹어야 할 사람들은 말을 해줘도 못 알아먹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제 에너지가 아까워졌거든요. 작가의 의도와 맥락 - 독자의 반응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포착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지점이지만, 표리부동한 태도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툭툭 건드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차라리 나체를 자랑스레 드러내며 거리를 활보하는 '바바리맨'이 정신 건강에 더 낫단 생각마저 듭니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3. "정작 장애인들은 불편하단 얘기가 없는데 꼭 인권 단체들이 나서서 저런다."



지금도 해당 작품에 버젓이 달려 있는 댓글입니다. 불편하단 얘기가 있네요. 서두에 달아놓은 링크를 보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성명을 내고 공개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이래도 장애인들이 불편하단 얘기를 안 했나요?


마치 자신이 모든 청각 장애인의 입장을 전수조사해서 데이터를 확보한양 떠드는 전지전능 컴플렉스 가득한 사고방식에 진저리가 납니다. 저런 식으로 개인의 특징 - 이 경우에는 장애를 가졌다는 것 - 을 뭉뚱그려서 집단으로 표상한 다음 단편적으로 규정지어버리는 태도는 "혐오"의 가장 악랄한 특징입니다.


같은 청각 장애인 중에서도 누구는 불편할 수 있고 누구는 아닐 수 있지요. 비장애인들 사이에서도 같은 사안을 두고 입장이 다른 건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불쾌감을 유발할 만한 상황에 놓여도 누구는 크게 불편하하지만, 누구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가죠. 마찬가지입니다. 청각 장애라는 같은 상황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구성하는 나머지 정체성이나 세계관까지 동일한 건 아닙니다.


한국의 인권담론이 이제 걸음마 수준인데, 그렇다 보니 "당사자 중심주의" 같은 개념들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그걸 이런 식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당사자 중심주의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사건에서 발생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전제로 하여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부여되는 준칙에 가깝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갖다 쓰라고 생겨난 도구가 아닙니다.


#4.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는 함정


예전에 언론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비슷한 혹은 더 우월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사회가 비장애인에게 '노오오오오오력'을 강요하는 그 정서와 동일합니다. 하나의 성공신화로 포장되는 가운데 장애는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정작 '장애 극복의 사표'인 헬렌 켈러는 자신의 성과를 장애인 차별 철폐와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했는데 말이죠. 장애를 늘 안고 가야 할 이들에게 '장애를 극복할 것을 강요'하는 건, 전형적인 비장애인의 편견이 담긴 태도입니다.


저 또한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결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져버립니다. 만약 그것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면, 내가 아는 장애인 개인에게 가 닿았을 땐 아름다운 말이 될지 모르나 결론적으로 그 개인을 전혀 돕지 못합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사람답게 살 권리를 위해서 노력할 때에야 저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빌 게이츠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강요하는 게 잘못이듯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영웅서사를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장애인도 자신의 조건을 극복하고 비장애인처럼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장애를 가진 자신의 존재를 혐오하지 않고 혐오당하지도 않고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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