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틸드 Oct 31. 2019

대꾸와 댓글

"너 지금 나한테 말대꾸 하는 거야?"


라는 말, 살면서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겁니다. 거기엔 '네가 감히?'라는, 다분히 권력관계에 기반한 인식과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본인이 정한 예의와 권한의 선을 넘으면 더 이상 동등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냥 '닥치고 내 말 들어'야 하는 것이죠. 모부와 자녀 관계든, 선생과 학생 관계든, 상사와 후임 관계든, 선배와 후배 관계든, 하여튼 우리가 영 좋지 못한 관계를 맺기 쉬운 상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표현이 "말대꾸"입니다.


그런데 단어 자체를 생각해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봤던 '대구'와 비슷합니다. 지명 말고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어구를 짝 지어 표현의 효과를 나타내는 수사법 (feat. 국립국어원) 말입니다. 궁금해서 검색해봤는데 김빠지게도 '대꾸'와 '대구'의 어원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네요. 그래도 왠지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킹리적 갓심이 꿈틀거림을 느낍니다. 우리가 흔히 대구법의 대구를 '댓구'라고 발음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댓'이라고 하면 어떤 것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기대어 연결짓는 모양이 떠오르죠? '대구'와 묘한 공통점이 보입니다. '대꾸'도 그와 비슷하게 연결지을 수 있습니다. 권위자의 말에 사족을 덧붙인다는 인상을 주죠. 얼핏 건방지고 불필요해 보이는 그 '덧댐'은 알고 보면 권위라는 허울 뒤에 숨은 허약한 본체를 가로질러 권위자의 본질을 드러내는 폭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대꾸"의 맥락도 새로이 만들어졌습니다. TV를 보며 일방적으로 사랑하던, 편지나 선물을 보내도 직접 말 한마디 글 한 줄 오갈 수 없었던 연예인이라는 대상을 온라인 매체를 통해 좀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우리의 관심사인 그들과 텍스트를 통해서나마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된 겁니다. 연예인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포털 사이트 연예 기사의 댓글입니다.


그곳에는 이 연예인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증을 느끼게 할 만큼 다종다양한 댓글들이 달립니다. 일방적인 사랑의 표현부터 삼대를 멸하고픈 열망이 느껴지는 증오의 댓글까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사람에게 정말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말을 덧대고 사라집니다. 그 댓글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정 사진 앞에 놓는 국화 다발, 마녀로 몰린 사람을 태우기 위해 쌓아놓는 장작더미 같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의 덧댐이 죽여버린, "사회적 타살"로 인해 살해된 이들이 비단 연예인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노출된 모든 이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굳이 최근 한 아이돌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대꾸'가 갖는 새로운 맥락과 의미는 사회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보다 나은 선망의 대상을 동경하기보다는, 자신이 그가 알지 못한 고통을 갖고 있다는 데서 권력을 성취합니다. "너는 이런 고통 모르지? 너처럼 화려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뭘 알겠어?" 고통이 자신을 증명하는 강력한 힘이 된 겁니다. 지저분하게 표현하자면 "부정적인 자기 긍정"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조금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우리가 가슴 아파했던 그 아이돌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보면 명백한 성적 권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노브라를 선언하고, 자신의 사생활이나 연애에 대해서 당당하게 밝히며 사람들이 "여자다움, 연예인다움"으로 규정해놓은 것들에 대해 "말대꾸"를 하던 사람이 바로 그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불편함을 느낀 쪽은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대응은 "댓글"이었지요. 드러난 양상만 보면 "말대꾸"의 첫번째 맥락과 두번째 맥락이 충돌한 것 같지만, 명백히 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의 큰 맥락에서 보면 첫번째 말대꾸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감히 여자가"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댓글로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너와 내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말대꾸의 첫 번째 역할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어찌 못해서 가둬놓은 채 소용돌이치다가 편한 방법으로 배설하기보다는, 끙끙대며 다른 방법을 찾아서라도 고통의 원인 제공자와 그 구조에 말대꾸하는 게 세상을 더 낫게 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진짜 고통의 원인 제공자이며 그 구조인지 알아채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그 진짜를 찾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포털 사이트 daum이 연예기사면 댓글 서비스를 잠정적으로 중단한 오늘, 언론의 참혹한 현실과 정보권력의 문제를 남겨두고라도 적어도 한시적으로나마 우리에게는 그 주어진 침묵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요.

매거진의 이전글 기안84의 청각장애인 비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