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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Nov 06. 2019

이야기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잠시 트위터를 들여다보다가 발견한 트윗을 보고, 일전에 꽤 흥미로운 지인의 포스팅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그 트윗의 내용은 "요즘 사람들이 작품을 볼 때 인내력이 부족해진 것 같다. 글쓰는 사람은 캐릭터의 결함이야말로 이야기의 동력이라고 하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완제품을 내놓으라고 한다. 서사를 푸는 과정을 못 기다리겠다는 거다"였습니다.


그 트윗을 보고 제게 일전에 페북에서 봤던 지인의 포스팅이 기억났습니다. 저 트윗의 내용과 비슷한 경험을 적은 포스팅이었습니다. 감정선이 이어져 사람을 설득시키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완성된 캐릭터를 만들려고 하는, 소위 v요즘 친구들v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비단 요즘 친구들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어릴적 하던 게임에는 치트키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를 순식간에 우주최강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치트키를 써서 플레이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제가 치트키를 썼던 동기는 대부분 게임 내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을 빨리 보기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제 개인 경험을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야 없겠지만, 같은 완성형도 누군가에게는 이야기를 뛰어넘기 위한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이야기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지금처럼 전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발달하기 전에는 이야기를 전하던 매체가 주로 이나 드라마, 영화였습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시간을 들임과 동시에 인내해야 끝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책을 읽다가 지하철을 내려야 해서 아쉽게 책장을 접어야 했던, 드라마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끝난다며 방송국놈들(!)을 욕했던, 생리현상이 밀려옴을 느끼면서도 결말을 알기 위해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법 합니다. 그 시절에는 이야기가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텍스트와 사진을 넘어 동영상을 순식간에 실어나르는 지금, 우리는 방에서, 잠들기 전에, 화장실에서, 길에서, 카페에서, 그 어느 곳에서라도 이야기를 이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재미없는 부분, 관심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스킵하고 짧은 시간에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온라인 미디어의 발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내력을 잃게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했듯이 대중이 수동적으로 이야기에 이끌리기만 하던 시대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로의 이행은 그리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 이야기에 관한 지금 시대의 반응은 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라, 지금 이 짧은 지면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느끼기에 확실한 원인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이야기를 참지 못하게 된 것이라면, 어쩌면 지금의 세대는 삶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강제로 거둬버리고 잊어야만 하는 압박을 일상적으로 겪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전혀 없는 '꼰대들'에게 시달려 이야기라는 것 자체에 질려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위로를 얻고, 숨을 돌리고,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세계의 고전 중에는 그러한 동기로 전해진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과 고통과 절망이 지속되어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그것이 만성적인 것이 될 때, 이야기는 거부당하고 죽어버리게 됩니다. 온라인 미디어의 발달도, VR 기술의 발전도 겁나지 않지만 저는 그게 제일 겁이 납니다. 혹시 이야기가 거절당하는 시대가 오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요.


경제의 위기와 사회적 위기는 인류 역사에 항존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더더욱 악독하게 고착화시키고 있고요. 우리에게 진짜 위기는 이야기 소멸의 위기입니다. 온라인 미디어가 타인의 말을 듣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말 중에 듣기 싫은 것을 Skip하는 기술로만 쓰인다면, 위기의 심화에 일조하는 셈입니다. 인류는 노래로, 그림으로, 글로, 영상으로, 몸짓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행위를 예술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것을 들을지 말지 선택할 자유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듣지 않음을 넘어 거절과 혐오로 나아가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노래로 이야기를 건네는 저에게도 꽤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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