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틸드 Dec 01. 2019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세상의 부조리와 그것이 주는 고통이 자신을 괴롭혀서 혁명이든 개혁이든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다른 모습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뜻을 품고 소위 v운동v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나는 꽤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다. 타고난 것 같다. 내 다른 면은 굉장히 예민하고 감성적이어서 정서적인 공감을 잘 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민감함은 나를 구성하는 큰 기둥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그런 성향이 나로 하여금 노동자의 자녀로서의 내 처지를 깨닫게 했고, 몇몇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그런 옳고 그름을 더 예리하게 분석하는 공부를 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사회학을 하게 됐고, 소위 말하는 "꿘"의 세계에도 간접적으로 몸담았다.


그러다보니 세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의 고민은 서서히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내 삶이 먼저일까, 세상의 변혁이 먼저일까?" 다시 말하자면 "내 생존이 먼저일까, 세상의 변혁을 위한 운동이 먼저일까?" 이다. 실제로 활동가들, 운동가들은 늘 생존의 고민에 직면해 있다. 학생운동이 가장 강렬했던 시기에 몸을 바쳤던 소위 386 세대는 비교적 낫지만, 90년대를 관통하며 자라난 세대는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보내며 전방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몸을 바쳐 운동"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생존과 직결시킬 수 없다. 그걸 가능하게 할만한 멋진 목표를 상상할 수도 없고, 어렵사리 세운대도 그 목표에 동조할 지지자도 찾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그 목표를 세운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조차 어렵다. 당장 고시원에서 라면 한 끼로 연명해야 하는 게 내 처지라면, 무슨 에너지로 누구와 함께 그런 '거사'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는 다른 의미에서 "가난을 두고 싸우는"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가난은 그저 감추고만 싶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내가 제일 가난하며 가장 고통스런 삶을 산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런 가운데 정말 저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묻힌다고 걱정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통 배틀"의 승자는, 애초에 하루 하루의 고단한 삶 때문에 내 고통이 니 고통보다 심하다는 둥 남의 삶에 잠깐 눈돌리는 것조차 사치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고통을 제거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정공법으로 들이받아 봤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겉으로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실제 내 일상에서는 어떤 진보를 경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경험의 축적을 다른 방식으로, 지금 세대에서는 고통에 대한 전시와 인정의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간혹 "가난"에 대해 날 선 논쟁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로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예전에 지인들끼리 맥주를 마시다가 어쩌다 나온 고통 배틀에서도 나는 초장에 손가락을 접어야 했다. 학자금대출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내 이름으로 큰 빚이 달려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딱히 큰 빚을 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빚이 당연하고, 가난과 생존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 인생의 표준이 되어버린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큰 빚이 없다는 이유로 되려 미안해지는 이상한 감정을 체험했다.


오늘도 가난에 대한 트윗이 떠도는 걸 보다가 한 트친이 20대 시절 내가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다짐하던 자신에게 "그것도 배불러서 할 수 있는 소리"라고 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올린 것을 봤다. 물론 그 말에 대해서는 반박이 가능하다. 군부독재를 지나 지금의 민주화를 이룩하기까지 밑바닥에서부터 투쟁하며 쌓아올렸던 진보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배불러서 할 수 있는 소리"라는 말도 고픈 배를 부여잡고 정의를 위해 싸웠던 영웅적인 이들 앞에서는 배부른 자들의 비겁한 자기 변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영웅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이젠 그런 소수의 영웅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내 생존을 확보한 뒤에 변혁 운동을 해야 하는가, 생존을 담보물로 저당잡힌 채 변혁 운동에 뛰어들어야 하는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일 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주 교과서적인 정답을 말하자면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통해 세상의 변혁으로 확장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한 대로 보자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그 정답에 가장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에게는 오답일 수 있다. 일단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고 해버리면, 무게중심이 개인의 삶과 생존이 되어서 정작 사회 변혁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 주저하게 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포기하지 못할 것"이 생긴다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운동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비추어 개인의 생존과 사회 변혁의 관계를 재정의한다면, 나는 그것을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로 보고 싶지 않다.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작용한다고 보고 싶다. 그래서 거대한 법 제도의 변화가 비록 지금 당장 일상의 변화로 가시화되지는 않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의 일상과 인식을 바꿀 것이고, 일상의 변화가 비록 지금 당장 구조의 변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 화학작용을 일으켜 거대한 변혁을 낳을지 모르는 잠재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폭력운동"에서는 일상의 작은 불만이나 고통도 결코 작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비슷한 불만과 고통을 가진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작당할 수 있고, 작당하다 보면 운동을 할 수 있으며, 운동을 하다 보면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보면 진짜로 그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비폭력운동이 만들어 낸 실제 사례는 숱하게 많이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그런 사건들이 잉태되고 자라고 폭발하고 있다.


최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불의에 대한 내 감각을 심각하게 건드린 사람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감정을 처리하고 있는 중인데, 그 사람의 발언을 듣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서 제지한 것이 벌써 서너 차례 정도 된다. 그래서 고민 중이다. 내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이 사람에게 본인의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그리고 알려주고 난 뒤에도 언행의 변화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어느 정도 답은 가지고 있다. 이미 이전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던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내게 제공해 준 좋은 사례들 덕분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예전에는 그 사람과 비슷한 언행을 일삼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 나를 고쳐주었고, 그것이 양분이 되어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내가 분노를 느끼는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일상 속에서의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의 가치에 조응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알려줄 생각이다.


7~80년대 학생운동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은 대학생들이 구로공단 등 실제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사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오만함이나 만용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대학생들의 행보를 오늘날에 맞게 해석해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신, 학력, 능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언제든 가난과 고통에 처할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평등한 가난과 고통의 사회" 속에서, 어쩌면 사회 변혁에 눈뜬 이들은 어떤 특권의식도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 맞닿아 있는 이들에게 '반 걸음 앞의 풍경'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반 걸음 앞으로의 진보는 바로 내 생존과도 직결되기에 크고 매력적인 목표는 전혀 필요가 없다. 단지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역시 같은 일에 힘쓰고 있는 누군가와의 적절한 연대만이 요구될 뿐. 그러한 연대의 연쇄작용이 얽히고 설켜서 더 이상 끊을 수 없게 될 때, 가난보다는 조금 더 나은 무엇인가가 우리 모두를 찾아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얼른 씻고 일찍 자야겠다. 내일의 내가 가까이서 만나는 누군가에게 좀 덜 신경질적일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