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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 이야기

by 엔틸드

탄광 하나를 팠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 깊은 곳의 열기가 가득한 곳,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쉬이 들어가지는 못하는 곳이다. 탄광을 파고 원석을 건져 이리저리 다듬는 작업을 하기를 몇 년, 뒤에서 탄광이 무너져 내리는지도 모르고 파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이 갇혀버린 상황. 더 이상 원석을 파낼 힘도, 그것을 가공할 방법도, 가지고 나갈 길도 없다. 선택할 방법은 하나. 들어온 방향을 막고 있는 저 돌들을 다시 파내고 또 파내는 수 밖에. 뒤를 돌아 작업을 시작한다. 노래를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루틴의 반복이다. 노랫말도 그렇다.


싱어송라이터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가깝다. 자신이 부를 노래를 자신이 만들고 그것을 목소리와 악기로 재현하는 음악가. 그렇기에 자신이 지은 멜로디와 그 위에 얹어지는 가사는 대체로 싱어송라이터의 정체성, 지향, 고유한 색깔을 담고 있다.


홀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에게 "가사가 참 좋네요"라는 피드백은 어떤 의미일까? 예술가들의 흔한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멜로디는 별로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게 사실이다. 대체로 좋은데 그 가운데서 가사가 더 좋게 부각되어 들린다고 이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보다 더 가사를 잘 쓴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비교하는 나를 발견한다.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예술이란 분야도 지독하리만치 "자뻑과 자학의 반복"이 계속되는 분야다.


상승세와 하강세 중에 더 위험한 흐름은 각자마다 다르고 그걸 극복하는 방식도 다르겠지만, 글쓰는 사람들이 예전의 자신의 글을 보며 지금의 나에게 자극을 주듯이 예전에 쓰고 부르던 가사가 어느날 침체된 가수에게 새로운 흐름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멋진 창작, 멋진 편곡, 멋진 공연으로 이어지는 좋은 리듬을 타면 좋겠지만 어느 순간 삐걱거리고, 그게 깊어지면 그리움을 가득 담은 향수병처럼 과거를 돌아본다. 내가 쌓아온 것들, 보여주었던 것들, 그 모양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나오는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연관성 없는 몇 가지 물질을 모아다가 연성하면 귀금속이 탄생하는 연금술을 경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아웃풋은 인풋의 모양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노랫말도 그렇다. 만드는 이가 보고 듣고 만지고 겪은 것들이 묻어나오는 세계, 그것은 때로는 나를 발가벗기고 전시하는 것과 같아서 두렵지만 터지는 박수소리에 황홀감으로 취하게 만드는 순간을 주기도 한다. 나 자신이라는 인풋으로 나의 노래라는 아웃풋을 내놓았을 때 박수를 받을 수 있다니, 이건 한 인간의 삶의 행로를 결정지으리만치 놀라운 경험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또 많은 사람들은 다시 탄광을 파들어간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쓰러졌다가도, 빠져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곡괭이를 든다. 지금 귓가를 스치는 노랫말이 태어난 탄광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런 마음 하나쯤 담아두고 귀를 열어준다면, 당신은 그 순간 세계 최고의 리스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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