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삶에 대하여 (3)
버림과 올림이라고 하면, 공공교육을 이수하던 시절 배웠던 수학의 개념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104라는 숫자가 있다면, 이것을 1의 자리에서 버림하게 되면 100이 되고 올림하게 되면 110이 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반올림은 십진법의 중간 숫자인 5를 기준으로 이상이면 110이 되고 이하이면 100이 된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에서 반올림을 하면 100이 된다. 그러므로 버림과 올림보다는 반올림이 좀 더 정확한 근사값을 나타내고, 버림과 올림은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매정한 인상을 풍긴다.
더 수학적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의 목적이 수학 개념을 공부하는 게 아니므로, 그저 버림과 올림이 원래의 수를 편의를 위하여 다른 숫자로 '나타낸다'는 정도만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2018년 기준 남한의 전국 주민등록 인구는 51,826,059명인데, 우리는 보통 십만 자리까지 버려서 51,000,000명(오천백만명)이라고 말하거나 십만 자리에서 올려서 52,000,000명(오천이백만명)이라고 표현한다. 아예 오천만명이라고 하는 게 더 통례에 가까울 정도다. 일상 속에서도 각각의 목적에 따라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버림과 올림을 자유자재로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버림과 올림이 가장 빈번히 적용되는 예는 개인의 재정을 점검할 때다. 돈을 알뜰하게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출을 계산할 때는 올려서, 수입을 계산할 때는 내려서 한다. 만약 보험료로 한 달에 128,096원이 나간다면 130,000원으로, 월급이 1,845,997원이라면 1,800,000원으로 계산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갑자기 생기는 일회성 지출에도 대비할 수 있고, 자투릿돈이나마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림과 올림은 일상을 넘어 우리의 내면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먼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부정적인 사건을 올림하고 긍정적인 사건을 내림하며, 또 그와 반대로 적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태도가 바깥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부정적인 사람이다' 또는 '긍정적인 사람이다'라고 평가한다. 이에 대한 가장 흔한 예시가 반 쯤 차 있는 물컵을 보고 "어, 물이 반이나 들었네?!"와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네?!"라는 두 반응을 비교하는 것인데, 물이 있으면 마시면 되지 뭘 쳐다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은 답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암튼,
뇌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스스로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감정을 증폭할 수도, 반대로 긍정적이거나 행복한 감정을 증폭할 수도 있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같은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 필자이지만, 순간 순간 나 자신을 위해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그것으로 마음의 올림과 내림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는 여지는 나 자신에게 분명히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런 여지가 '노오오오오력'의 부족이나 사회구조적인 불의를 가리는 비겁한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또한 순간 발생한 기억이나 감정 등을 아래로(무의식으로) 내리거나 위로(의식으로) 올리는 버림과 내림이 있을 수 있다. 부정적인 요소를 아래로 내릴 수도 있고, 긍정적인 요소를 위로 올릴 수도 있다. 네 가지의 경우의 수를 두고 지금도 우리의 뇌는 열심히 선택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나를 화나게 했던 사건과 그 때의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와 괴롭히는 건, 말하자면 뇌에 의해서 버림되었던 것이 다시 올림된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필자는 위에서 버림과 올림의 수학적 개념을 말할 때 그것이 원래 숫자를 다른 숫자로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하자고 했다.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요소를 버리고 긍정적인 요소를 올리기를 원하지만, 그 버림과 올림은 우리가 직면해야 할 원래의 값을 가리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나의 능력이 54라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올림으로써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버림과 올림의 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국면마다 꼭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한 사건이나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른 계기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로서 전 세계 언어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조지 레이코프는 우리의 언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삶이 '은유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것을 은유를 통해 표현하고 또 느끼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누구도 완벽한 학술적 정의를 내리거나 실체화하여 보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이 그 무엇인가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체험을 돕고 그 경험을 드러내어 체화시키도록 하는 것이 은유인데, 말하자면 사랑을 '주다/받다', '숨기다/보이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랑은 대상object이 될 수 없지만, 은유를 통해서 대상화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 기억, 정서, 감정 따위를 단순히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뇌의 작용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을 다루는 은유가 있기 때문이다. 버림과 올림도 마음을 다루는 은유의 일종이다.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 마음의 문제로 인해 힘들 때, 그래서 마음을 '쓸' 때, 우리가 마음을 '둔' 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할 때, 마음을 은유로 다룰 수 있음을 기억하자. 알뜰한 재정 생활을 위해 그리하듯이 버림과 올림을 통해 마음에 쓸 에너지를 저장해 놓을 수도 있으며, 버림과 올림을 통해 자칫 쉬이 지치거나 쉬이 바람이 들 수 있는 마음을 다잡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마음의 원래 값을 알고 그것을 버림과 올림을 통해 어떻게 나타낼지 결정하는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다. 부디 우리 잘 버리고 잘 올려서 다가오는 차가운 시절 마음만은 따뜻하게 덮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