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싸우며 걷다
걸을 만한 시간적 여유, 내가 원하는 걸을 만한 장소, 적절하게 준비된 몸과 마음, 그리고 거리의 환경까지 완벽하다면 나의 걷기는 참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 것 같다. 걷기 위해 거리에 나온 사람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살기 위해 거리로 내몰리듯 나온 사람들이 금세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역의 노숙인들, 번듯하고 번잡한 큰 길 한구석에 천막을 치고 통행을 방해하는 농성장, 차들이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대로 한복판의 기둥 같은 곳 꼭대기에 올라 몸을 내걸고 있는 해고 노동자가 있다. 그들의 걸음은 일상의 걸음과는 다르다. 아니, 일상의 걸음이 싸움의 걸음으로 바뀐 사람들이 그들이다.
길 위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사정이야 이해하지만 뭔가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그렇게 보여 슬쩍 피해가는 것이 보통의 반응이다. 나는 한때 그런 분들과 함께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일'을 급여를 받고 하는 노동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도 가끔 그런 현장에 방문하고 있다.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함께하게 된 현장 사이에 애초에 얼마나 큰 연관관계가 있었겠냐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함께한 현장들은 대부분 길 위에 있었다. 이 글을 보는 많은 분들에게 현장은 어색한 공간일 것이고, 나 또한 처음에 그랬다. 모두가 스쳐가기 바쁜 거리에서, 낯선 공간에 멈춰선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낯선 이가 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석사논문을 쓸 때의 일이었다. 논문 주제도 길 위의 싸움과 관련이 있었고, 마침 그 시기에 알게 된 현장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하던 한 성폭력 피해자이자 부당해고자의 싸움이었다. 성폭력을 당한 건 이 쪽인데 오히려 피해자가 해고까지 당해버린 불의한 상황에,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농성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다른 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거리에 앉아 자리를 깔고 기도회를 가지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농성장의 열악함도, 당사자의 아픈 속사정도 아니고, 나를 쳐다보는 행인들의 눈길이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고, 누군가는 신기한 눈초리로 곁을 지나간다. 평소 같은 행인의 처지일 때는 신경도 쓰이지 않던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명확하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된다. 어떨 때는 방관자로, 어떨 때는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순간 그 자리에서만큼은 나도 거리 위에 선 사람들과 같이 "낯선 이"가 된다.
여성가족부 앞에서의 싸움은 승리로 일단락됐다. 피해자는 복직했지만, 전해듣기로는 직장 속에서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 후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는 사람의 힘으로 옮길 수 없는 화단이 놓였다.
그 곳에서의 승리는 다음 싸움으로 바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재개발로 인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상가세입자 부부였다.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집행을 하는 용역에 의해 가게가 파손되고 두 분 중 한 분이 큰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북아현동 재개발지구, 사람이 다닐 길이 없다시피한 곳을 오르다보니 가게가, 아니 농성장이 보였다. 좁은 통행로를 막고 찻길에 닿아있어 행인과 농성자 모두의 안전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 곳 또한 처음 방문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한겨울 매우 추운 날이었는데, 기도회를 갖기 위해 10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농성 텐트를 채우니 사람들의 온기로 금세 훈훈해졌다.
그 때만해도 딱히 조명이 없어 농성장에 있는 촛불로 대신했는데, 너울대는 불꽃 너머로 밖을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확 하고 다가올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혹시 경찰은 아닐까, 용역은 아닐까, 농성장에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은 아닐까, 아니면 드물지만 농성장을 방문하려는 사람일까... 거리에 서 있어야 하는 이들은 실은 벌거벗은 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 가한 폭력 때문에, 누군가 가할 폭력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서서, 그 폭력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싸우는 이들은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하염없이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문자 그대로 거리를 걷는다. 누군가는 구호를 외치고, 누군가는 오체투지로, 누군가는 어깨를 함께 겯고, 그렇게 낯선 이들의 낯선 걸음이 시작되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그렇게 몸으로, 걸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북아현동의 싸움 중에서 재개발지역을 기도하며 돌았던 때가 있었다. 기독교의 절기 중 사순절Lent이 있는데,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고 기념하며 보내는 경건한 기간이다. 마침 돌아온 사순절기를 맞아 십자가를 앞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고통받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올리며 행진했다.
열 두 기도처를 정해놓고 처소에 도착하면 함께 그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나누었던 그 행렬에는 기대와 탄식, 희망과 절망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중요 장면은 우리의 싸움을 그러모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교리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걸음에 함께하며 다시금 고통받는 예수, 투쟁 당사자만큼은 아니지만 함께하는 이들은 걷는 행위를 통해 그 예수를 서로 나누었다.
북아현동의 투쟁은 절반의 승리로 끝났다. 사장님들은 다른 곳에서 장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장사하며 맛으로 행복을 전하고 있다. 승리를 축하하며 농성장을 철거하던 날, 모든 정리를 마치고 떠나기 전 뒤돌아 본 그 곳은 금세 여느 거리와 다르지 않게 돌아가 있었다. 거리는 결국 거리일 뿐이다. 그 곳은 사람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며, 그런 곳에 사람이 머문다는 것은 사회에 이상이 생겼다는 증거다. 거리는 다시 거리로 돌아갔지만, 그 이상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모였던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그 곳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변해도, 함께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남아 언제든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싸움은 길고 혹독하며 두렵고 잔인하다. 낮은 이와 낯선 이들의 싸움은 결코 미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싸움의 장소가 거리가 되었을 때 다가오는 단상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는 거리라는 공간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싸움을 만났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그 변화는 어떤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몇 년 동안 걷기와 싸움을 병행했던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그 둘 사이에 생겨날 어떤 빈 틈을 기대하고 있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