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꿈꾸며 걷다
베냐민에게 도시는 매혹적 구성물이었다. 연대기가 깔끔한 직선의 시간적 구성물이라면, 도시는 배회하지 않고서는 지각할 수 없는 공간적 구성물이었다.
-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이 연재물의 작성을 추동했던 원인이기도 한 <걷기의 인문학>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저 유명한 발터 벤야민은 도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인물이었다. "...도시를 헤매는 일, 마치 숲속을 헤매듯 도시를 헤매는 일에 필요한 훈련은 길을 찾는 일에 필요한 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벤야민의 말이다.
내가 온전히 걷기에만 집중했던 시간들은 말하자면 "배회"를 위한, 떠돌기 위한 것이었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같을지라도 단순히 슈퍼마켓에 가기 위한 걸음일 수도 있고 아무런 목적 없이 이곳 저곳 휘뚜루마뚜루 쏘다니는 모양일 수도 있다. 부러 떠도는 걸음을 나섰던 이유는 우리가 자주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건물 아니면 교통수단이라는 공간에만 자신을 맡겨서 좁아지지 말고, 도시라는 거대한 공간과 내가 직접 만나 도시 공간에 대한 나의 시야를 넓힘으로써 나를 좀 더 풍성하게 할 요량이었다.
보통 우리는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한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유플래쉬 코너에서 곡 작업의 일부를 담당했던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이런 가사를 썼다. '길을 잃어본 지 오래야.' 그는 거기에 "요즘은 내비나 지도앱으로 길을 다 알려주니까"라는 코멘트를 붙였다. 연애하던 시절 애인은 흔히 말하는 길치였다. 꼭 가야하는 방향과 반대로 갔다. 어떤 때는 막다른 길에 닿거나, 꼬불꼬불 복잡한 골목을 헤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아. 결국 길은 다 이어져 있으니까." 라고 말해줬다.
'길을 잃는다'는 말은 현대인에게 물리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굉장히 익숙한 말이다. 우리에게 '떠돈다'는 것은 감히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최상급 기술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전복해버리는 열차와 같아서,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매 순간 주입받는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길은 여러가지이며 모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지만,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고속도로로 가야한다는 목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진다. 이런 세상에서는 떠돌지는 못해도 잠시 벗어날 수만 있어도 성공일 것이다.
'야마카시'로 알려졌던 도심 익스트림 스포츠가 있었다. 그것의 정식 명칭은 '파쿠르'. 프랑스의 한 군 장교가 만들었다고 하는 이것은 스포츠이기도 하고 무술이기도 하다. 주변환경이나 지형 지물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움직임의 예술이다. 파쿠르는 번역하면 '도 道', '길'이다.
예전에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 파쿠르를 보급하는 분의 파쿠르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많은 내용이 감명깊었지만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있다. '거리에 테이블과 의자 등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뛰어넘어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파쿠르는 외부에서 오는 두려움을 인지하고 신체의 활동을 개선하고 도전하여 정해진 길을 벗어나 창조적인 나만의 길을 만드는 것이고, 이런 작업이 일상 속에서 가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테이블과 의자를 도구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이 파쿠르입니다.' 라는 이야기였다.
파쿠르는 환경과 지형을 인위적으로 바꾸라고 말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이용하여 없던 길을 만들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일탈'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탈'하는 순간 우리가 이 도시와 거리와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흘러가는 대로 따라야 했던 억압의 공간에서,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미지의 자유를 향유하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떠도는 행위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남들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무엇을 가지고 길을 창조할 수도 있지만, 이미 있는 길을 재발견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길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향유하는 해방을 맛볼 수도 있다. 떠도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이야 내가 떠도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이 나를 군중의 하나로 여기겠지만, '길을 잃으면 안 된다'는 정언명령에 사로잡여 있는 '도시인'인 내가 되려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도시인 정체성을 광범위하게 뒤흔한 사건이 우리에게 있었다. 불과 몇년 전,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 그 해 겨울을 뒤흔들었던 '촛불시위'가 그것이었다. 서울에서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매 회 백만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모여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아무리 정부가 막장이었다지만, 그 많은 인파를 막을 수는 없었고 자연스레 경복궁, 광화문, 시청 일대가 시위자들이 활보하는 해방 공간이 되었다.
말 그대로 그 곳은 해방공간이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가고, 모였다 흩어지고, 함께 먹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희귀한 시간과 공간이었다. 몇 차 집회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그 날은 청와대로부터 불과 100여미터 떨어진 곳까지 열렸는데, 그러다보니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딱 걸어다니기 좋은 산책로, 공원, 광장이 됐다.
평소에는 차들이 차지하고는 한 방향으로만 열심히 달렸던 경직된 대로가 사람들이 이리저리 자신만의 길을 만들며 떠돌고 일탈하며 방황하고 전진하는 다양성과 창조성이 꽃피는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그리 넓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관점, 지평, 태도, 상상력은 냇가만 알던 아이가 처음으로 바다를 본 듯, 잠시나마 넓게 펼쳐졌을 것이다. 그 때 그 곳에서는 모두가 벤야민이었고 파쿠르 수련자였다. 이리저리 떠돌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며 이 사회를 뒤바꿀 새로운 가능성과 또 다른 미래를 꿈꾸었던,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값진 보물과 같은 순간이었다.
이 연재물의 초반부에, 걷기라는 행위는 나에게 집중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내가 세상을 느끼는 감각, 그 느낌을 해석하고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일련의 행위가 걷기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여유가 주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베냐민을 비롯해,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심지어 과학자들이 산책과 걷기 중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곤 했다.
음악을 하는 나에게 걷기는 노래의 소재, 특히 가사의 내용을 건지는 좋은 기회를 준다. 실제로 거기서 얻은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 곡을 완성한다. 걷기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지만, 전혀 엉뚱한 생각으로 타고 타고 넘어가 전혀 새로운 조합의 심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전의 사유와 감정의 포착을 새로이 확장하는 힘 또한 가지고 있다.
자신, 걷기, 음악에 세상의 이야기가 더해져 탄생한 노래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며 만든 노래, 거리에 서서 홀로 일인시위를 하는 이를 보고 만든 노래, 북아현 농성장에서 함께 하다 만든 노래, 가장 높은 굴뚝과 가장 낮은 바닥에서 싸우는 이들을 보면 만든 노래... '사회적 걷기'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세상의 고통을 이야기한 나의 노래들은 모두 이러한 '사회적 걷기', 고통받는 이들이 걷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탄생했다.
배회, 일탈, 해방, 창조 ... 이 모든 것들은 걷기가 '꿈'을 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은 소망이자 새로운 자신과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이다. 교통수단이나 집 안에서 바라만 보다가 몸으로 직접 세상을 만지게 해주는 걷기라는 행위는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허락한다. 떠돌아도 좋고, 엉뚱한 길로 가도 좋고, 나만의 해방구를 만들어도 좋고, 걸으며 무언가 만들어 내도 좋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이 가슴 깊이 품고 있던 꿈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지금 당장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걸어보라. 아무런 목적없이, 그저 걷는 걸음에 집중해 보라. 그렇게 시작한 걸음은 당신을 우리 수많은 걷는 이들에게로 이끌어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걷는 이들이 품은 각양각색의 꿈들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무언가를 바꾸어낼 것이다. 사람의 걸음이란 평균 4km/h의 느린 속도일 뿐이지만, 뒤를 돌아보라. 저만치 뒤에서 걷던 당신은 이제 없다. 지금 길을 걷는 당신만이 존재한다. 당신이 걸어온 거리만큼 당신은 바뀌었고, 그 변화가 당신을 또한 새로운 변화로 이끌 것이다. 자, 이제 다시 걸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