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 #4
국제정치의 행위자 = 국가
비교적 최근까지 위의 등식은 항상 참이었다. 그러나 국제기구나 민간 기구에 더해 영향력 있는 개인까지 다수 출현해 국제정치의 행위자 자리를 꿰찬 오늘, 더 이상 위의 항등식을 무조건 참으로 볼 수는 없다. 국제정치에서 '국가 행위자'가 가지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강력한 행위자이고, 그 위용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국가 행위자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먼저 행위자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국제정치에서 행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존재를 명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2.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최소한의 자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3. 다른 행위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일정한 기간에 걸쳐 존속해야 한다.
오늘날 위와 같은 조건들을 충족하는 기관과 단체, 개인은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가 강력한 행위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가 다른 행위자들에게 없는 몇 가지 특성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1. 국가 안의 모든 개인과 단체는 국가 권력에 종속된다.
국가 안의 모든 개인과 단체는 국가 권력에 종속된다. 따라서 국가 안의 모든 개인과 단체는 국가더러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할 권리와 능력이 없다. 그 무엇도 국가 권력에 침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 국가 권력의 비침투성(impenetrability)이라고 한다.
#2. 국가는 가치를 분배한다.
국가는 가치를 공정하고 권위적으로 분배할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 책임이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국가가 가치를 불공정하고 폭력적으로 분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비침투성을 가진다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비침투성이 국가 권력의 무소불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의 비침투성은 개인이나 단체가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해악을 예방하기 위해 보장하는 것이지, 국가의 폭거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개인과 단체가 국가 권력에 보내는 충성심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충성심은 곧 투자다. 개인과 단체는 가치의 공정하고 권위적인 분배를 기대하고 국가 권력에 충성심을 투자한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그 기대를 충족할 채무를 가진다.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투자는 없다.
#3. 국가는 '국력'을 가진다.
국력이란 무엇인가? 칼 도이치는 국력을 가치의 분배 과정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으로 정의했다. 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국력에는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있다.
인구, 천연자원, 지리적 조건(영토의 크기, 위치, 지형 등), 국민성, 정치 체제, 산업 능력, 군사력
(인력, 무력, 통수 능력), 국민의 사기, 외교력
각각의 요소들은 국가 정책의 방향성이나 전문가들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첨단군사기술의 등장으로 지리적 조건의 중요성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게릴라를 이용한 단기전과 국가 전복을 목표로 한 침투 작전이 전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만큼 여전히 지리적 조건의 중요성이 높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군사력 또한 다양한 평가를 받는데, 병력의 수에 영향을 주는 인력과 무기의 종류와 수, 질에 영향을 주는 무력, 인력과 무력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통수 능력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마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다.
한편 국력의 요소 중 국민의 사기는 그 성격이 충성심과 비슷하다. 국민의 사기 역시 개인과 단체가 국가에게 투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민의 사기는 일반적으로 국민의 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의미하는데, 국가 자체에 대한 지지도를 의미하는 애국심과는 다르다. 애국심이 높아도 국민의 사기는 낮을 수 있다.
#4. 국가는 영토 내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 수단을 가진다.
국가는 영토 내의 개인이나 단체가 비합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려 할 때, 가장 강력한 폭력 수단을 동원해 이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영토 내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 수단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행위자가 다양한 유형의 폭력을 행사하는 오늘날, 국가가 영토 내에서 가장 강력한 폭력 수단을 확보했는지 여부가 정말 중요하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국가의 형태를 살펴보자.
1. 봉건국가(feudal state)
동아시아에서 서주(기원전 1123년~기원후 771년) 시대에, 유럽에서 중세시대에 주로 나타났다. 군주(왕) 아래 수많은 지주(영주)들이 있고, 지주들은 군주로부터 땅(봉토)을 하사 받는 대신 군주를 호위한다. 상호의존하는 관계이자 일종의 계약 관계로 볼 수 있다. 계약 관계의 특성은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잘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봉건제가 혈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질서에 가까웠다면, 유럽에서의 봉건제는 대부분 계약 관계였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가리켜 쌍무적 계약 관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2. 제국(empire)
속국을 거느린 강대국을 일컫는다. 평등한 주권 국가들이 합의를 통해 종속 관계없이 수립한 통일 국가나 연방 국가는 제국이 아니다. 속국은 대내적인 주권(=자치권)은 행사하나 대외적인 주권(=외교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속국을 반(半)주권국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속국이 행사하는 주권은 일반적인 주권국이 행사하는 것과 성격이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속국이 행사하는 주권은 종주국의 주권 중 일부를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다. 한편 종주국과 속국의 민족 구성은 같아도 되고, 달라도 된다.
3. 민족국가(nation-state)
현대의 국가들은 대부분 민족국가이거나 민족국가를 지향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많은 제국이 무너졌고, 민족자결주의라는 원칙에 따라 패전국의 식민지들이 우후죽순으로 독립했다. 그 결과 민족국가가 주류인 오늘날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도 민족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