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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녘, 구멍, 구우멍 그리고 개구부

고용노동부, 안전보건공단

by 누두교주

아이들 어릴 적 끝말잇기 놀이를 가끔 하곤 했다.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매우 일찍 화학원소의 영어 이름을 익혔다.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스칸시슘, 티타늄, 니켈, 게르마늄, 루비듐, 로슘, 인튬 등등 연결만 되면 승부는 여지없이 결정됐다.


그 결과 우리 집에는 새로운 언어가 스멀스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튬튬해’는 많이는 아니지만 좀 출출해 간식을 먹고 싶은 상태라고 한다. ‘늄늄한 맛’은 다소 느끼하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라고 박박 우기기도 했다. 이렇게 시나브로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끝말잇기가 유치해지는 나이에 도달했다.




그 비슷한 시절에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TV 프로가 있었다. 대부분 농촌 어르신을 모시고 퀴즈도 풀고 덕담도 나누는 프로였는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풍성한 사투리를 즐길 수 있었다. 끝말잇기 놀이를 해도 사투리와 결합하니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가 속출했다.


계란 – 난닝구 – 구녘.


이 게임의 승부는 ‘구녘’에서 갈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구녘’은 ‘구멍’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표준어는 ‘구멍’으로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구멍 보고 쐐기 깎아라. 구멍에 든 뱀 길이를 모른다.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 등등의 속담이 푸짐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 구멍‘을 ’ 개구부‘로 부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도 국가기관(고용노동부)이 관련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안전보건 공단과 ㈜규담종합건설이라는 회사, 그리고 정화예술대학교도 ’ 구멍‘을 ’ 개구부‘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 그 물적 근거를 제시한다.


종로구 이화동 31-9 공사현장 차단벽에 걸린 알림 막이다. 10월 25일 오후 4:51에 누두교주가 찍었다.


’ 구멍‘을 ’구녘‘으로 발음하는 전라도 어르신은 절대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문화유산의 일부로 보존하고 기록할 일이다.


그러나 ‘구멍’을 ‘개구부’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치가 않다. 왜? ‘개구부’가 도대체 어떻게!, ‘구멍’을 표현하는 말이 됐을까? 아마도 한자로 억지로 만든 것 같다. 개구부(開口部) 즉 ‘열리는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안전모, 안전대가 세 글자이니 구멍도 세 글자로 짝을 맞추려고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현상을 전문용어로 ‘꼴값 떤다’라고 표현한다.


차라리 꼴값 떨며 개구부라고 하지 말고 그냥 ‘구우멍’, 또는 ‘구우녘’ 이라고 하면 어땠을까? 글자 수도 맞고 보다, 정확히 그 뜻이 전달되지 않았을까?




애먼 트집 잡으며 말장난하지 말라고? 이 걸림 막의 오른쪽 위를 보라.


안전을 위한 우리를 We한

이 정도는 돼야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을 한 우리를 한’이라고 할 때 ‘(爲)’는 '위한다' 뜻의 한문이다. 그걸 우리말로 착각해 같은 발음의 영어를 가져다 붙인 것이 장난이라면 장난이고 무식이라면 무식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특정 질병의 이름을 소환해야 한다. (염병!)


왼쪽 위에 좀 더 큰 글씨로 쓴 것도 일관 되게 말장난을 하고 있다.

건설현장 3대 기본안전 고!고!고!


고는 틀림없이 높다(高)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가자(GO)’의 뜻일 것이다. 어딜 가는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간 틀림없이 ’ 개구부‘에 빠진다. 뚫린 구멍이나 구녘에 빠지면 욕이라도 한마디 하겠지만 개구부에 빠지면 뭐라 할꼬! “오우 싯!”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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