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壬寅)년도 경술(庚戌) 월에 이르러 벌써 음력 10월이다. 가을의 절정을 타고 넘어 겨울 초입으로 밀려가는 때다.
그간 살아온 내 경험에 따르면, 겨울은 춥다. 추위는 더위와 달리 웅크리게 하고 주눅 들게 하며 더듬거리게 한다. 그래서 가을의 분주함은 웅크리기 위한 다급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겨울이 다가오는 느낌은 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수돗물도 어느 날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다가올 동장군에게 여름의 열기를 들키지 않으려는 속셈이리라. 강물의 흐름도 느려지고 조용해지고, 맑아진다.
그래서 커피도 조용하고 얌전하고 부드러운 녀석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른 것이 콜롬비아 수푸리모 (Colombia Supremo)①다.
이 원두의 특징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얌전하다’. 그래서 이 녀석을 마실 때는 우유 데우는 것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조금 잘못하면 오히려 우유가 거칠게 느껴질 정도이다.
녀석의 향(香)은 위로 하늘거리지 않고 차분히 아래로 깔린다. 그래서 향이 코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코끝을 살짝 스치고 부끄러운 듯 숨는 느낌이다. 아마도 녀석의 고향인 안데스 산맥 커피농장, 커피 따는 아가씨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닐까?
나는 여자가 부드럽게 대하고 공손히 이야기하고 행복한 눈빛을 보일 때는 사고 쳤을 때와 사랑에 빠졌을 때라고 믿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고 치고 나서도 눈을 희번덕거리고, 사랑은, 아파트 베란다 큰 창을 넘어 토깐지 오래인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외도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그분을 추억할 따름이다.
아침 식사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 옆에 카페 메뉴를 건다.
내가 새로 만든 커피 메뉴다. 毛二는 글자 그대로 모이다. 일용할 양식이다.
그리고 항상 카푸치노를 준비한다. 그분이 카푸치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갱년기에 접어든 그분에게 영양학적으로 매우 적당한 커피 메뉴이기도 하다. 정성 들여 하트를 만들고 가끔 커피 쿠키도 더해 서빙한후, 내 것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유 거품은 강아지 몫으로 갈무리해 놓는다.
콜롬비아 수푸리모는 마시는 사람도 얌전하게 하는 효험이 있다. 카푸치노 잔이 시나브로 비어감에 따라 그분의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말이 차분해지는 것을 여러 번 느꼈다.
진즉 그랬으면 내가 안데스 산맥 커피농장 아가씨를 마음에 품지 않았을 텐데....
잠깐 허튼 생각을 하다가 주섬주섬 일어나 잔을 챙기고 커피 설거지를 할 때 꼭 하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훌륭한 커피를 매일 만들어 주는데 어딜 눈을 희번덕거리고 목청을 높일 생각을 하는지, 그 희한한 뇌 구조를 잠깐 고민하곤 한다.
아무튼 내가 무엇을 하던 가을은 갈 테고, 겨울은 틀림없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안데스 산맥, 수줍은 아가씨의 부드러운 미소를 품은 커피가 있으니,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서는 아침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 대문 사진 설명 : 아침에 그분께 진상한 카푸치노다. 사과를 표현했다. (사실, 원래는 궁둥이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왔다)
① 콜롬비아는 남미의 나라 이름이고 수푸리모는 ‘최고위의, 최고 권위의’라는 뜻의 스페인 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