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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壬寅年) 가을 앞에서

나희덕 「그 이불을 덮고」

by 누두교주


나이를 더하며 점점 구체화되는 소망이 있다. 더 많이 웃고 싶고 더 실없는 말을 많이 하고 싶다. 걱정하고 고민하고 번뇌하기보다 실실 웃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잘 거른 술을 실컷 마시다 누구랑 술 먹는지 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또는 신선(神仙)이라고도 부른다.




‘봄이 철이 들면 가을이 된다’는 생각을 해봤다. 여기저기 감당 못 할 정도로 꽃을 피워대고 나무마다 물을 올려 대 극성스러운 여름의 소란함을 지나서 차분히 갈무리하는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그 오지랖은 어쩌지 못해 저마다 욕심껏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이파리는 어쩔꼬? 꽃도 아닌 것이 열매도 아닌 것이, 이제 마르고 색이 변해 떨어져 갈밖에. 나는 이파리를 닮은 것 같다.


자꾸만 가을 앞으로 등을 떠밀려 주춤주춤 다가가지만, 맘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가벼워지고 점점 성성해지는 것을 보면 미룰 일도 아니고 도망갈 일도 아니다. 그러니 신선 타령을 할 밖에......


그래서 억지로 남의 시를 끌어다 위안을 삼아 본다. 별 쓸모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만 아쉬운 대로 다소간의 용처는 있지 않을까?

노고단 올라가는 양지녘

바람이 불러모은 마른 영혼들

(중략)

그 이불을 덮고

한겨울 여린 풀들이

한 열흘은 더 살다 간다

마침 금요일이고 바람도 짐짓 소슬한 것이 한잔하기엔 그만인 날이다. 해넘이를 지나 어스름 저녁이 되면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이미 벌어진 술판이라도 기웃거릴 일이다.



나희덕 지음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경기. 파주. 2017.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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