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걷는 것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다. 힘든 가파른 산길 말고 평평한 길이 좋다. 좋기로는 나무가 많아 공기가 달고 흙길은 축축해야 한다. 이런 길을 두어 시간 남짓 걸으면 몸에 땀이 촉촉해지고 생각하던 문제는, 항상 미래지향적인 매듭으로 묶여 정리된다.
반대로 생각을 완전히 비우고 멍 때리고 싶을 때는 불을 보는 것이 좋다. 그것도 시뻘겋게 혀를 날름거리는 살아 있는 불이 제격이다. 너울대는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안의 모든 것은 빨려 나가 나는 껍질만 남아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불로 순화된 텅 빈 내 영혼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뭔가 먹어야 한다. 불의 정화를 거쳤으니 이번엔 불맛을 느끼는 것이 어떨까?
하지만 내가 착하게 행동한 날에는 와플 굽는 틀을 쓸 수 있었다. 그 사각 틀이 글라디올러스처럼 새빨간 불꽃의 가시를 짓눌렀다. 먹기도 뜨겁지만 만지기에는 더 뜨거운 와플이 어느새 완성되었다. 그렇다.나는 불을 먹었다. 뜨거운 와플이 내 이 사이에서 바사삭 부서질 때, 내가 먹은 것은 불의 황금, 불의 냄새, 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였다. 언제나 그랬다. 불은 디저트 같은 일종의 호사스러운 즐거움으로써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한다.①
다 좋은데 와플의 틀이, 글라디올러스처럼 새빨간 불꽃의 가시를 짓누른 게 못마땅하다. 아무리 와플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걸 보면 역시 서양의 와플보단 우리 떡이 좋다. 떡 중에도 불 떡(火餠)이 있다.
메밀가루를 고운체에 내린 다음 된죽처럼 반죽을 한다.그리고 마당에 참나무 모닥불을 피워 실컷 타게 둔다. 적당히 타고 연기가 그칠 때쯤 준비한 메밀즙을 부으면 그 즙이 타면서 말라 떡이 된다. 그러면 이 녀석에 묻은 재를 베어내서 누렇게 익은 부분을 꿀에 적셔 먹으면 된다.
이것은 산골짜기의 소박한 식품이다. (此山峽眞率之食品也)②
참나무 모닥불을 피우는 것도 좋고, 다 타길 기다리는 것도 좋고, 잦아든 불에 메밀 반죽을 척 얹는 것도 좋다. 그걸 헤집어 재와 깜부기를 발라내고 남은 것을 꿀과 함께 먹다니. 참 맛날 것 같지 않은가? 불맛과 재향 그리고 맑은 산골의 공기까지 달콤하고 쌉쌀한 꿀에 버무려지는 느낌이다. 왜 사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준비했던 장작을, 첫서리 지난 볕 좋은 날 그득히 쌓아 놓으면 흐뭇하고 따뜻하다. 겨우내 난로 안에서 불꽃으로 넘실거리고 물을 끓이고 참나무 연기를 집안에 묻히게 된다.
창고 안에 참나무 장작을 쌓고 공간이 모자라 창고 밖에도 쌓았다.
그런데 장작 무더기가 무릎아래쯤 되면, 불 보는 것도 싫증 나고, 불 냄새가 싫어진다. 집 안 보다 집 밖이 따뜻하고 자꾸 나가고 싶어 진다. 봄이 어느샌가 근처에 와서 꼬드김을 시작한 모양이다.
이런 날엔 무작정 밖으로 나가 쏘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다 허기가 찾아들면 오랜만에 자장면으로 속이는 게 어떨까?
춘장을 기름에 볶고, 마늘, 파, 생강을 기름에 볶아 웍에 향을 채운다. 그 위에 고기를 볶다가 간장과 술로 풍미를 더 하고, 이내 준비한 야채를 투하한다. 그리곤 강한 불에 짧게 빠르게 볶아야 한다. 이어 볶은 춘장을 넣고 육수와 물녹말을 부어 야채에 밴 불맛을 잘 가두어야 한다.
이렇게 만든 자장면을 먹을 때는, 뺀질대는 표정으로 젓가락만 가지고 실실 웃는 누군가가 밉지 않다. 배어 있는 불맛이 마음을 너그럽게 한 것이리라.
같은 불맛인데 언제는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언제는 왜 사는지 알게 한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
불 보고 먹을 궁리만 하는 건가?
** 대문 그림 : 시골집에 있었던 화목 난로이다. 처남이 직접 제작했다.
①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지음, 이세진 옮김 『에코의 위대한 강연, SULLE SPALLE DEI GIGANTI』주식회사 열린책들. 경기, 파주. 2022. p. 165.
② 풍석 서유구『임원경제지 정조지 1』 풍석문화재단. 서울. 2020. pp. 396-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