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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 궁전의 추억

by 누두교주

보통 프랑스 여행을 가면, 파리부터 간다. 하지만 나는 파리로 들어가지 않고 프랑스 황제의 궁전이 있다는 파리 남쪽 퐁텐블로(Fontainebleue)를 먼저 찾았다.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우버를 이용해 차를 부르니 대략 90유로 정도의 요금이 나오는 거리였다.


가는 빗발이 추적이는 퐁텐블로는 우리나라 읍(邑) 정도 되는 매우 작은 도시이다. 저녁 9시도 안 됐는데 모든 상점, 식당이 문을 닫아 와인 한잔은커녕 끼니를 걱정케 하는 이상한 도시에서 첫 밤을 보냈다. 이 조그만 동네에 프랑스의 왕도 아니고 황제가 살던 궁전이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퐁텐블로의 아침은 조용하고 맑고 깨끗했다. 프랑스 골목을 느릿느릿 거닐며 프랑스 공기, 프랑스 꽃집, 프랑스 개, 프랑스 청소부, 프랑스 경찰을 보고 블랑제리(Boulangeire–빵집)에 들려 프랑스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퐁텐블로의 아침 풍경이다.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닌데 이렇듯 한적하다. 프랑스 자전거는 바퀴가 이상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 꽃집이다. 이 도시는 꽃집이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것 같다. 꽃 값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꽃집에서 기르는 프랑스 강아지다. 장난감을 던져주면 항상 두 마리가 함께 물고 가져온다.


프랑스 경찰은 늠름했고 프랑스 청소부는 여유가 있었다. 둘은 친구 같기도 했고 연인 같기도 했다. 다만 하는 일만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않다


여기서 빵 두어 개를 고르고, 커피 한잔을 더해 아침식사를 했다. 입성이 부실한 젊은 여자가 매우 친절해 좋았다.


빵집에서도 그랬는데 닭튀김을 파는 곳에서도 음식물을 그냥 맨손으로 만진다. 그러나 손님에게 줄 때는 반드시 비닐장갑을 낀다. 프랑스의 독특한 위생 관념 같다.


퐁텐블로 궁전(Château de Fontainebleue)!


이날은 이곳에서 졸업식 행사가 있었다. 하버드보다 좋다는 국제 대학원 캠퍼스의 일부가 이도시에 있다고 한다.


이 궁전은 약 900년 전인, 우리나라 고려 인종 임금 시대에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사냥용 별장으로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중종 임금 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본격적인 왕실 궁전으로 확장 개업했다. 그러나 그 후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이 신장개업하면서 정치적 중심에서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며, 궁전의 예술품과 가구는 파괴, 약탈되었다. 이점은 프랑스 대혁명과 중국의 문화 대혁명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중국 궁궐의 사자는 새끼를 데리고 있는데 프랑스 궁전의 사자는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프랑스가 중국보다 축구를 잘하는 이유에 대한 역사적 근거라 할 만하다.


폐허의 고성(古城)을 되살린 사람은 그 이름도 찬란한 나폴레옹 1세였다. 11세에 타의에 의해 왕이 된 조선의 순조 임금 시절, 프랑스의 키 작은 친구는 ‘왕이 아닌 황제의 거처’로서 퐁텐블로 궁전(Château de Fontainebleue)을 재개발했다. 완공 시점엔 교황을 불러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이 황제의 관을 씌워준 게 아니고, 지가 직접 썼다. 그리고 몇 년 뒤, 6살 많은 전처 조제핀 과는 이혼하고 22살 연하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해, 신접살림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40세, 마리 루이즈는 18세였다. 참으로 부러운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좋은 시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나폴레옹이 직접 황제의 관을 쓰고, 교황은 뻘쭘히 쳐다보고 있다. 앞줄 중간에 빨간 옷을 입은애가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된다. 이 그림 사진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찍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 후 이곳에 와서 전략회의를 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황제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궁내 인사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유명한 작별 연설(Aieuxde Fontainebleau)을 하고 엘바섬으로 귀양길을 떠났다. 이로써 황제국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망했다. 퐁텐블로 궁전은 부르봉 왕정의 거처로 변신했다.


나폴레옹 1세의 대리석 좌상이다. 앞면 사진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뒷면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뒷면을 찍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쫓겨난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가 나폴레옹 3세라며, 스스로 황제가 되어 퐁텐블로로 돌아온 것이다. 당연히 퐁텐블로 궁전은 왕궁에서 다시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대원군이 한창 쇄국정책에 열을 올리던 무렵,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됐고 퐁텐블로 궁전(Château de Fontainebleue)은 황제의 궁전에서 국유재산으로 전환되었다.


다들 알지만 말하지 않는 사실 중 하나는 ‘궁전, 궁궐 또는 대궐에 가면 짜증 난다’는 점이다. 일단 면적이 쓸데없이 넓어 걸어 다니기 피곤하고, 각종 건물과 시설물들의 현실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땡볕이 내리쬐는 날씨의 궁궐 관람은 형벌로 사용해도 효과가 충분할 것이라는 상상을 여러 번 해보았다.


하지만 퐁텐블로 궁전은 달랐다. 우선 위압적이지 않았다. 커 보이지 않고 한눈에 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팔을 벌려 환영하는 오랜 친구 같았다. 첫눈에 들어오는 말발굽형 계단! 나폴레옹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병사들이 찔찔 울던 장소이다. 그러나 비감하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보카 델라 베리타(Bocca ella Verita - 진실의 입)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퐁텐블로 궁전에도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있다


또 다른 진실의 입이다. 무식하게 생긴 마동석이 '진실의 방'을 만든 것은 진실의 입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말발굽형 계단을 보며 정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은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사실은 그 규모가 매우 적다는 점이고, 더 놀라운 사실은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궁전에서 느꼈던 이질감 대신에 마치 와본 것 같은 기시감! 하지만 그 격조 높은 품위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공사장에 붙은 공사 안내문이다.

공사는 공사고 관람의 편의는 관람의 편의다. 공사장 뒤편 궁전 내부이다. 나는 천장의 등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정문에서 볼 때는 아담 했는데....... 몇 발 나서니 엄청난 숲이 보였다. 하지만 숲 앞자락엔 맑고 탁 트인 호수가 있고, 호수가 끝나는 곳엔 한가로운 잔디밭, 그리고 그 잔디밭을 품은 궁전! 이곳은 사람이 살던 곳이고 지금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호수 건너 멀리 숲이 보인다. 과거 사냥터였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호수는 물새보다 물고기가 힘이 센 것 같았다. 물고기들이 물새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물새들은 코너에 몰려있다. 프랑스 사공은 참 섹시하다는 생각도 했다.
호수와 궁전 사이 잔디밭에 있는 동상이다. 나는 이 동상의 제목을 "그만 마셔야 했어!"라고 붙였다.

대문 그림 : 퐁텐블로 궁전(Château de Fontainebleue)의 정문이다. 그 유명한 말발굽(horseshoe) 형 계단이 바로 보인다. 군사적 위엄과 궁정의 화려함을 상징한다. 나폴레옹이 근위대에게 작별인사를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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