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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의 아침 – 모네와 인상파

by 누두교주

“모든 그림은 상상화다”

아무리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진처럼 똑같을 수는 없다. 어떤 물감도 자연과 사물의 색을 100% 똑 같이 표현하지 못한다. 참으로 무식한 미술에 대한 인식인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상식적인 질문에 답할 필요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모나리자의 그 여자는 다빈치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몇 날 며칠을 실실 웃고 그 자세로 앉아 있었을까?


프랑스 절대 왕정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하는 ‘루이 14세의 초상’을 자세를 보면, 얼굴이 동동 떠 다니는 느낌이다. 그 이유는 뭘까? 절대 권력자가 불편한 자세로 얼마나 오래 서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위그리고(Hyacinthe Rigaud)는 평소 다른데 그리고 있다가 루이 14세가 오면 잠깐씩 마름모꼴로 비워논 얼굴을 그린데 원인이 있다. 그래서 얼굴이 기형적으로 작고, 60대 할아버지가 40도 안 돼 보이는 것이다.


60넘은 할배가 쫄쫄이 레깅스에 굽높은 신발을 신고 이자세로 몇 시간을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불편한 진실을 고백한 한 무리의 화가들은 인상파(Impressionism)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흑·백 요리사에 영감을 받아 ‘흑수저파’라고 하는 게 옳다고 본다. 조선 시대 명성황후가 아들은 낳은 1874년, 프랑스 국전(불어로는 살롱)에서 낙선한 애들끼리만 모여 전시회를 열었다. 흑수저 전시회 아닌가? 여기서 모네(Oscar-Claude Monet)가 무성의해 보이는 그림을「인상, 해돋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했다. 이 그림은 독특한 평가를 받았다.


이 그림의 평가과정서 '인상파'라는 표현이 탄생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일본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별로다.


"이건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저 순간적인 인상(Impression)에 불과하다"


하지만 흑수저 화가들은 비평가의 조롱을 기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모네(Oscar-Claude Monet)!

흑수저 화가의 대표 선수다. 그는 사물의 형태보다 빛의 변화, 공기의 흔들림, 그리고 순간의 색조를 집요하게 추적했다고 하는데.....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거 아닌가라는 심드렁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파리의 느끼한 인조물에 식상한 터에 한적한 외곽의 녹색을 본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임에 분명했다. 파리에서 70km 정도 떨어진 모네의 동네 자베르니(giverny) 마을의 첫인상은 무척 한가했다.


상쾌한 아침을 맞기위해 호텔을 나서면 항상 쓰레기 무더기가 나른 반기는 도시. 파리다.
식당안 풍경이다. 어제 손님이 가자마자 식당 직원 모두가 퇴근해 설겆이가 안된 식탁! 파리의 아침 풍경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좁은 입구의 담장에 기대어 줄 서서 기다렸다. 그 유명한 모네가 40대부터 40년 넘게 살았다는 집과 정원, 그리고 동네라고 해서 매우 대단한 줄 알았는데, 대충 보기에 우리나라 웬만한 수목원 보다 못했다.


아직 입장이 안되는 이른 시간이라 좁은 골목에 줄 서 있는모습. 녹색이 편안하다

하지만 관람 포인트를 오가며 왜 인구 1,000명 밖에 안 되는 동네에 나처럼 뛰어난 인격을 가진 관람객들이 줄지어 찾아오는지 알 수 있었다. 자베르니의 모네집과 정원은 모네의 생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변화 없이 보존하기 위해 주도 면밀하게 변화시켰다. 그리고 모네집 울타리 밖의 환경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모네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을 것 같다.


지상의 오솔길은 전혀 넓히지 않았다. 다만 계단을 내려가 지하도를 이용하면 인파를 피해 지름길로 갈 수 있다. 지하도 벽을 보고 신경 많이 썼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내려오면 만나는 지하도다. 중앙선 표시가 있고 전등이 밝아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다. 물론 지상의 어떤 것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연못에 누가 빠진다고..... 튜브와 경비원까지 있다.


요건 모네 옆집 닭이다. 물론 그집에도 사람이 산다.


아무리 봐도 머우나물 같은데, 제때 따먹지 않아 크게 웃자란 것 같다. 벌레를 먹은건지, 우박의 피해를 입은건지 한참 고민했다

모네는 여복이 많은 화가였다. 나와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첫 아내 카미유 동시유(Camille Doncieux)는 아내이자 뮤즈였다. 그녀는 젊은 시절 모네가 무명 화가였을 때 모델이 되어주었고, 가난 속에서도 집 나가지 않고 함께 동거하며 그의 창작을 지탱했다.


첫 아내 카미유 동씨유(Camille Doncieux)를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카미유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상실은 모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는 이후 자연에 더욱 몰두하며, 인간보다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에 더욱 매진했다. 인간 모델이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모네가 그렸던 수련 연못이다. 지금도 수련이 떠있다.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리다. 각도에 따라 꽃이 다르고, 꽃 색깔과 주변이 맞게 패어링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은 내가 모네 귀신이 씌운 것인가?

그렇게 사랑했으면 조신하게 혼자 살던지...... 자신을 후원하던(돈을 대주던) 후원자의 아내인 알리스 오슈데(Alice Hoschedé)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녀는 모네가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지베르니 정원에서 평생의 연작(수련, 연못)을 이어갈 수 있도록 현실적 안정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한다. 모네의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꿩먹고 알먹고 그린 그림


모네를 수식하는 “자연의 시간성과 빛에 몰두하는 화가”로 인도한 것이 첫 번째 부인이었다면, 두 번째 부인은 모네에게 생활의 안정과 장기적 작업을 가능케 했다. 덕분에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서 평생을 바쳐 ‘수련 연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즉 남자가 뭔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발전적 변화가 절대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복수의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 모네의 삶이다.


지베르니 마을 모네의 집은 관광지다. 그래서 기념품 가게가 있다.


혹자는 모네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라기보다, 그의 작품 세계를 지탱한 정서적 기둥이자 삶의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모네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도 지금 어디 가서 그림을 그려야하나? 내 삶을 지탱하는 정서적 기둥과 삶의 전환점을 고민한다.

지베르니 마을 주민. 지베르니는 작고 조용한 동네이다. 커피와 빵, 샐러드로 브런치를 즐겼는데, 파리의 반값 정도였다.


지베르니 마을 동사무소다. 지베르니 마을가서 동사무소 동서기를 찾아간 한국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문 그림 : 꽃이 있는 곳이 모네의 집이다. 그 밖은 목초지로 소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닌다. 내가 본 것은 모네가 본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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