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그녀와 똑닮은 딸의 살벌한 전쟁
오늘 나는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큰 아이를 키울 때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났었다.
우리 집 큰 아이와 둘째 아이는 참 다르다. 첫째는 이제 3학년이 되는 아들녀석인데 어릴 때부터 크게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하는 일이 잘 없었다. 어릴 때에도 설득이 되는,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인정을 하는, 인정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서로의 상황을 그래도 (아이와 어른의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풀거나 다독이면서 해결이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둘째는 달랐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녀석(!)인데, 어떤 문제상황에 닥쳤을 때 대화나 설득으로 풀 수 있는 경우가 (큰 아들녀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일단 본인의 감정이 우선인 아이었다. 옳고 그름은 일단 뒷전이고 내 기분이 속상한지, 풀렸는지가 우선이었다. "니가 뭘 잘 했다고 지금 그렇게 크게 우는거야? 안 그쳐?"라고 하면 되려 큰 소리로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하고 되받아친다. (그 때도 당황했더랬다. 그...그래....눈물 날 수 있지... 안 그쳐질 수 있지...맞네...)
오늘 둘째 아이가 나에게 혼이 났다. 최근에 주양육자에서 벗어나면서(?) 시간 커트라인만 주고 알아서 그 시간에 맞추어 해결하도록 기다려주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는 저녁루틴을 가졌던 터라 크게 버럭 모먼트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버럭 모먼트가 있었고, 그 때 둘째가 나에게 크게 혼이 났었다. 해줄 수 없는 일에 꼬투리를 잡고 그 것을 반드시 해달라 조르고 조르고 삐져있었다. 어짜피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기에 그 징징거림이 길어지는 것이 싫었던 나는 한 번에 끝내리라 결심하고 단호하게 크게 그만하라 소리쳤다. 오랜만에 듣는 큰 소리의 혼남에 (내 목청은....참으로...크다) 놀라고 무섭고 또 원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된 상황에 마음이 상한 둘째는 오늘도 역시나 울음으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달래주지 않았다.
갑자기 울다가 벌떡 일어난 둘째는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갔다. 또 저 끝방이나 가서 웅크리고 울고있겠지 하고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상한 효과음이 들렸다. "띠리리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둘째는 집을 나갔다. 이 추운 겨울에 외투도 입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순간 신랑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동시에 외쳤다. '뭐...뭐지?'
둘째 딸은 오늘 가출을 시도했다. 7세의 가출이라니. 당황했지만 일단 따라나가면 지는 것 같아서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딸의 싸움에 직접적인 참가를 하지 않았던 신랑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따라가려고 했다. 나는 신랑을 말리며 패드로 현관문 바깥 상황을 일단 보자며 나가지 말고 바깥을 한 번 보자고 말했지만 이 추위에 딸이 걱정되었던 신랑은 기어코 나가서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가출이었지만 딱 비상구까지 나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여전히 울며 아빠에게 안겨 들어왔지만 그런 자기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엄마를 보더니 다시 나가겠다고 땡깡을 피웠다. 그런 딸에게 나는 또 매정하게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돼. 대신에 외투 입고 나가."라고 했다. 가출했다고 '딸이 요구했던 해줄 수 없는 일'을 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안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절대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울거나 고집피우거나 떼를 쓴다고 들어주면 절대 안된다'는 것이 나의 교육관이다. 차분하게 나에게 '본인의 생각을 대화로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대화를 통해 들어줄 것은 받아들여주겠다'는 것이 내가 지키려고 하는 일관성이다.
다행히 오늘 이 기싸움에 참전하지 않은 신랑이 조용히 딸을 데리고 들어가더니 속닥속닥 대화를 시도했다. '엄마는 네가 이렇게 이렇게 예쁘게 이야기하면 들어줄걸? 가서 한 번 얘기해봐.' 얼핏 이런 내용으로 대화를 하는 듯 했다. 자기와의 대전상대가 아닌 아빠가 이야기해서인지 감정을 내려두고 듣던 아이는 한참 뒤 겸연쩍은 표정으로 엉금엉금 내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감정이 우선이던 떼쓰기 단계는 지나간 듯 보였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멀찌감치부터 살짝 풀린 표정으로 기어오는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이도 타이밍을 보았는지 후다닥 기어오더니 나에게 안겼다. (야시방맹이. 이럴 땐 또 눈치가 빨라요.) 아빠와 연습한 말을 나에게 속삭였다. 나도 한 발 물러서서 해줄 수 없는 일의 타협점을 제안했고 딸은 이를 받아들였다. 휴전이다.
중립국인 아빠의 중재가 오늘의 전쟁을 멈추었다. 전쟁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중립국인 아빠는 마음 편하게 밤 약속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