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your usual walking story
책과 글과 친해지면서 나의 독서습관에 가장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책 더럽게 읽기'. 책을 읽다가 그냥 밑줄을 좍- 그어버린다. 공감가는 문구, 멋진 표현을 발견하면 감탄하며 연필을 찾는다. 내 맘을 알아주는 친구를 찾은 기분, 글쓰기 표현을 맛깔나게 하는 스승님을 만난 기분도 든다. 밑줄을 좍- 긋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나도 이런 적 있는데...', '이런 상황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아니면 그냥 'ㅋㅋㅋㅋㅋㅋㅋ'만 적어넣기도. 때론 싸우기도 한다. '이건 좀 아닌듯한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등.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낙서하고 대화를 하며 구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펜과 노트가 있다면 직접 써보기도, 바로 옆에 펜과 노트가 없다면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찰칵 찍어본다.
이렇게 책과 글과 또 그 책글의 작가님과 남몰래 친해지는 중 휴가를 떠났다. 여행 캐리어에 책을 넣어본다. 예전처럼 읽으면 읽고 말면 말지 하며 한 두권 가볍게 넣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읽고 싶은 책인지 심사숙고하여 골라 넣었다. 그리고 기내용 가방에도 가볍게 한 권 넣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러 가기 전 서점에서 또 2권을 구입했다. 가방이 무거워졌다. 무거운 가방과 달리 여행 중에 내가 산 책을 다 읽으리라 마음 먹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휴가지에 내가 가져간 '산 책'들. 그 책들 중 내가 대화를 시도했던 구절들을 몇 개 적어보련다.
글쓰는 마음 (정민규(루카스 제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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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음을 쓴다'라고 말하고 글도 '글을 쓴다'고 하네.
그러고 보니 '마음이 쓰인다'고 하고 '글이 쓰인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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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코어.
중언부언하거나 길게 쓴다고 좋은 글이 아니다. 중심이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마음 중심. 이게 잡혀야 글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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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Right Light.
옳게 쓰고 가볍게 쓰기.
즉, 판단을 잘하고 글을 쓰기. 그리고 읽기 쉽게 쓰기.
이 분은 내가 좋아하는 말장난(!)을 잘하시는 듯하다. 언어유희. 그리고 글에 담긴 진심을 믿는 작가님이신 듯 하다. 짧고 간결한 글이지만 마음이 담겨있고, 단어의 맛을 잘 살려 읽는 나를 피식 웃음 짓게 하는 작가님. 일면식도 없지만 정민규 작가님은 오늘부터 나와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귤의 맛(조남주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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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귤하고 품종이 다른가?"
"똑같겠지?"
"근데 왜 이렇게 맛있지?"
"전에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가 마트에서 사는 귤은 초록색일 때 따서 중간 유통 단계를 거치는 동안 혼자 익은 거지만
이건 나무하고 햇볕에서 끝까지 영양분을 받아먹으면서 익은 거라 그렇대."
초록색일 때 수확해서 혼자 익은 귤, 그리고 나무와 햇볕에서 끝까지 영양분을 받은 귤.
이미 가지를 잘린 후 제한된 양분만 가지고 덩치를 키우고 맛을 채우며 자라는 열매들이 있다.
나는, 그리고 너희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이 소설의 제목이 귤의 맛인 이유를 이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없다. 딱 이 한 페이지에서만 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귤의 맛'인 걸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제목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조남주 작가님은 저의 스승님이 되셨습니다.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정덕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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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글이 안 써져서 걸었고 걸으며 글감을 떠올린다는 핑계로 걷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저 걷는 게 좋아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흔히들 산책하며 사색을 한다고 하지만 나는 걸으면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머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비워진 만큼 채워지는 우물처럼 이러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때 휴가를 떠나며 서점에서 충동적으로 집어든 내가 '산 책'. 드라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내가 드라마의 명대사를 가지고 쓴 이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덥썩 집어들었다. 책을 펼쳐들고 읽은 초반부 저자의 말에서 이미 내가 찜콩당했다. 얼마전 내가 '산책'을 주제로 글을 쓸 때 쓰다가 지워버린 소재가 바로 '산책'과 '사색'이었다. '프리디리히 니체, 장 자크 루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언을 빌어 산책유상의 위인들과 산책무상(아무 생각없이 산책하는)의 나를 비교하며 글을 쓰려다가 마음이 담기지 않아 포기 했었는데,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머리를 탁! 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분이 산책하는 '창릉천'은 우리 동네이다. 내가 마음 먹고 가아끔 나간다는 그 수변공원의 물줄기. 정덕현 작가님은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모를 저의 동네주민이십니다.
오늘 나의 이야기는 '산책'이다. '산책(walking)'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산(buying) 책'에 관한 이야기.
Not a walking story, but a book-buying story.
이것도 용기낸 시작이었다. 책을 더럽게 읽어도 된다는 마음을 가진 용기. 아니 감히 책에 낙서를? 낙서가 아니다. 책의 작가에게 말을 걸어볼 용기였다. 그리고 책과 나를 연결하는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