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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공개 Jul 13. 2022

세단기

사무실 단상집

세단기가 돌아간다. 와그작와그작. 네모나고 단단한, 참으로 투박하게 생긴 녀석은 위잉-소리를 내며 기밀문서를 씹어먹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칼날을 바라보고 있다.


저 칼날은 사실 굵기에 따라 보안 등급이 분류된다. 칼날이 두꺼울수록 보안 등급이 낮고, 칼날이 얇을수록 보안 등급이 높다. 이에 따라서 제품에 대한 규격이 분류되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모든 생각을 세단기에 밀어 넣는다. 말려들어가는 종이를 보며 머리를 비워낸다. 가만히 멀뚱하니 서서, 나도 저 종이처럼 부수워진다면 머리가 좀 시원해질까, 와그작와그작. 생각을 밀어 넣는다.


너도 기계이듯이 나도 기계처럼 파쇄해야 할 서류들을 먹여주고 있다. 백여 장의 종이들을 세단기가 먹어대는 속도에 맞추어 한 순간의 끊김 없이 기계적으로 먹여주고 있다. 세로로 넣는 것보다 가로로 넣는 것이 시간이 덜 소요되어 훨씬 효율적인데, 이런 생각도 밀어 넣어야만 한다.


클립과 집게는 빼내야 하지만 스테이플러 심 정도는 넣어도 와그작와그작 잘 씹어댄다. 강한 놈. 몰래 넣은 고철은 언젠가 펄프 재생 공정에서 분리될 것이다. 아마도 재생지 생산 공장에서 펄프를 불려 파이버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하단에 가라앉히는 침전 과정을 통해 이물질을 제거할 것이며, 이런 생각도 밀어 넣어야만 한다.


이렇게 방심할 때쯤이면 무리하게 욱여넣은 종이들을 왈랄랄라 뱉어낸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용량보다 초과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뒤집어 돌려 넣어도 왈랄랄라 토해내는 건 똑같다. 해낼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는 순간 기계처럼 왈랄랄라 뱉어내는 게 참 짜증 나는데 부럽기도 하다. 욱여넣는 이가 대장님이건, 대대장님이건, 투박한 얼굴로 기계처럼 게워내겠지. 그러면 '어휴-' 한숨 내쉬며 절반으로 나누어 주지 않을까. 와그작와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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