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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공개 Aug 02. 2022

붉은 노린재

갑자기 우울해진 김에 쓰는 일기를 가장한 단편 글

그녀는 잠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마치 자살폭탄이 되기 위해 죽기 전까지 수류탄을 꼭 쥐고 있는 가난한 소녀처럼 침대 위에 쓰러져있었다. 한 손에는 미처 터지지 못한 불발된 알람들이 쥐어져 있었다.

한 시간 지각이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몸을 움직인다. 폭탄 맞은 머리로 화장실 문을 열고, 목표한 시간에 회사까지 도달하기 위한 시간을 계산한다. 그러곤 변기 뚜껑을 열고 변기 위에 앉아 멍하니 생각한다.


어제는 분명 운동을 하기로 했었다.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쓰기로 했었다. 갓생을 살자며 외치던 친구들은 저녁에 자신이 행동한 운동과 공부하는 모습을 인증하며 갓생테스트에 통과했지만, 그녀는 실패했다. 글을 쓰자고 자리에 앉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면대 앞으로 가 수도꼭지를 켠다. 눈치도 없게 물줄기는 힘차게 쏟아져내렸다. 조그마한 두 손에 물줄기를 받아 얼굴에 들이부어 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부풀어 오른 얼굴을 식히기엔 모자랐다. 부은 얼굴이 쪼그라들기를 바라며 어푸어푸 세수를 한다.

갓생. 갓생을 살려면 살아있기나 해야 할 텐데.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 고작 회사에서 상사가 습관적으로 던지티끌만 한 눈치에도 공포와 불안에 떠는 그녀는 무사히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녀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다. 가벼운 토너와 상쾌한 에센스를 동그란 얼굴에 챱챱 바른다. 작년부터 썼는데도 퍽이나 줄어들지 않는다. 도대체 이것들은 언제쯤 버릴 수 있는 걸까.

버려내고 싶다. 몸은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는 미친 듯이 불안을 향해 뛰어들고 있다. 맑아진 정신으로 실패한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이유들을 힘차게 쏟아내고 있다. 과연 인생은 살아낼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사무실에 지각을 하고 휴가를 낼 것이라 알려야만 했다. 별거 아닌 늦잠을 기어코 벌이고 말았다며 천벌을 받는 모습을 전달해야 했다. 지각은 직장인이라면 성실함을 증명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상사의 말씀이 있었다.

'바빠서 원피스를 입었어요'라는 핑계를 만들기 위한 출근룩을 고르고, 화장은 '화장을 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냈다. 날이 갈수록 아침을 챙기는 횟수는 줄어드는 건 아침만 되면 식욕이 줄어드는 탓일 것이다. 매일 굶는 아침, 매일 신던 신발, 매일 드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여전히 그녀는 초조하다. 그녀는 오늘 아침을 밑바닥 없는 자이로드롭처럼 불안감과 함께 시작한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돈도 못 버는 데 돈도 못 버는 취미까지 가지고 있으니 가망이 있는 걸까, 남들은 돈을 잘만 굴리는데 나는 잘하고는 있는 게 맞나. 보고 듣는 건 많아도 정작 아는 척만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가증스럽고, 그렇다고 달라지지 않는 스스로가 꼴 보기가 싫어서.


두 번째도 현실적인 이유이다. 왜 하필 불안과 초조를 전가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내뿜는 아우라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모조리 다 흡수해버리는가. 그리고 나는 왜, 스스로 탈출해내지 못하는가. 예민함. 모든 것에 대한 예민함. 쓸데없는 고민, 달라지지 않는 삶의 관성. 말만 번지르르한 삶, 걷다 보니 밟아버린 검은 물 웅덩이.

검은 물이 신발안에 고여 들어갔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고작 그래 봤자 지저분한 아스팔트 검댕과 미세먼지 슬러지, 시장바닥에서 구르다 온 누군가들의 농축된 배설들을 밟고 있는 거겠지. 몸은 여전히 걸어 나갔고 생각은 밑바닥 없는 자이로드롭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털럭- 신발 앞창이 떨어져 턱 빠진 늙은 악어처럼 벌어져 버렸다. 축 쳐져 너덜거리는 고무 깔창. 본드와 인조가죽으로 범벅이 된 지저분한 속마음이 속절없이 드러나버린 모습이 꼭 그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접착제를 사야겠다고 분명 어제 생각했었는데, 오늘도 실패하진 말아야겠다며 편의점을 향했다.


그녀가 편의점으로 향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항상 10분 남짓의 출퇴근길을 항상 걸어갔고, 같은 길목에서 같은 부근에서 무단횡단을 했다. 배가 고파도 굶을지언정 편의점을 들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편의점에 들어간 그녀는 순간접착제를 찾는다. 이건가? 하고 멈칫하게 만든 물건이 순간접착제가 아닌 립밤이었기에, '순간접착제를 립밤인 줄 알고 발랐다면 입술을 자르는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 걸까'라며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무사히 순간접착제를 집어 든 그녀는 아침 일찍 편의점을 들린 기념으로 식사용 단백질 드링크를 함께 집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어제 같은 얼굴을 한 편의점 직원이 있는 계산대에 물건을 내려두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바코드를 찍으려 하자, 붉은 노린재.

붉은 배를 까뒤집고 죽어있는, 작고 미동조차 없는 , 어디서부터 함께한 건지 알 수 없는 이것.


"헠"

그녀와 그녀는 놀람과 놀람을 동시에 똑같이 뱉었다. 옅게 터져버린 웃음.


그녀는 말했다.

"혹시 제가 데리고 온 걸까요."

그녀도 말했다.

"여기 벌레가 많은 편이라."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죽어있던 붉은 노린재가 내심 미안했던지 그녀가 들고 온 물건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괜찮다며, 물건을 집어 들었다. 죽은 그 녀석 덕에 잠시나마 생각을 쉴 수 있어서 말이다. 그녀는 또 생각한다. 벌레의 죽음에 웃음이 난 나. 비정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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