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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공개 Oct 26. 2020

서툰 글쓰기와 어린 작가

글쓰는 재미를 알아가는 산책

에 딱지가 앉도록 책 좀 읽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꿋꿋하게 책을 읽지 않는 나였다. 아직도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잠이 쏟아진다. 안 그래도 잠이 많은 나인데. 어떤 자세로 독서하는 것이 잠도 오지 않고, 근육이 뻐근하지도 않으며, 활자에 집중할 수 있는가. 다양한 자세를 시도하다 보면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나를 읽는 건지 헛갈렸다. 그렇기 나는 책과 멀어졌다. 텍스트보단 이미지로서 기억을 하는 편이었고, 어차피 각자의 취향대로 정보를 습득하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갖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생각들의 맥락이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상황이 떠오르면 파생되는 생각들이 폭발해 화수분처럼 쏟아졌고, 내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말로 꺼내는 순간, 생각은 말을 잡아먹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처음으로 글을 써보자 마음을 먹은 건 25살 때였다. 햇빛 알레르기에 걸린 지 딱 10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나의 병환을 기록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록을 남겼다. 의무감에 다이어리를 쓰듯 사실만 가득 채운 글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과 행동을 했다. 끝. 길지만 결국은 짤막했던 나의 글감들은 폴더 저 깊숙한 곳에 묻혀만 갔다.


처음으로 글을 끝내보자 마음을 먹게 된 건 5년 뒤였다. 특별한 계기라기보단 삶 속에 흐르다 만난 인연 덕분이었다. 처 끝내지 못한 나의 기록을 기필코 완결 지어야겠다는 마음에 파묻힌 나의 글감들을 캐내었다. 글은 읽혀야 살아나는 것. 나는 나의 기억들 -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과 행동을 한 것들 - 을 비아냥대고 있었다. 기록이라고 남겼던 그 글감들 속에서 나는 분노로 가득한 지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모든 활자 하나하나를 뜯어고쳤다. 과거의 나를 한 땀 한 땀 수선해나갔다.


다시금 새로운 글들을 써 내려갔다. 실로 글을 쓰는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위대했다. 그림을 그리면 내가 붓이 되고 붓이 내가 되는 것처럼, 글을 쓰면 내가 활자가 되고 활자가 내가 되었다. 그림은 이미지를 통해 집중했다면 글은 내 생각을 통해 집중이 되었고, 그림은 한 획의 미세한 떨림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면 글은 한 자의 섬세한 선택으로 뉘앙스가 달라졌다.


글을 쓰는 습관을 갖는다는 건 글을 쓰는 미묘한 매력을 깨닫지 못하면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폭발하며 쏟아진 중구난방의 생각들을 배설하고, 다시금 가다듬고 수선하면서 발설한다. 내가 내손으로 내뱉은 활자들을 보면서 되려 내 생각은 가다듬어진다. 홀로 글을 쓰면서 글과 상호작용을 하는데,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피드백을 나눈다면 그 상호작용의 파장은 더욱이 넓게 퍼지지 않을까? 글의 파동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나는 어린아이처럼 서툴다. 그렇지만 너무 떨리고 설렌다.


글을 쓰는 건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순서가 뒤바뀌었다. 글을 쓰다 보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도 책을 읽는 완벽한 자세를 탐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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