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공개 Oct 25. 2020

철수 아저씨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

밤 10시. 퇴사한 친구와 공적으로 연이 닿아 함께 야근하고 함께 퇴근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밤의 온도가 선선해서 평소보다 한정거장 일찍 내려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늘 밤도 운동을 못했다는 찜찜함에 동네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비틀,
비틀,
철푸덕.
(머리를 짚으며) 으으...


어후, 저 아저씨 저러다 머리 깨지겠다 싶었다. 무슨 사연이 그를 저렇게 취하게 만들었을까. 금방 술 깨겠거니 하고는 시선을 접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저씨에게 걸려있었다. 지나치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 아저씨는 이미 머리를 바닥으로 곤두박질하여 엠뷸런스가 도착하고 길바닥은 붉은 피로 흥건했다. 무시하고 지나쳐야겠다는 내 발걸음은 10m도 지나지 않아 유턴했다.


나는 아저씨를 관찰했다.

아저씨가 토할 것 같은가? 아니.

아저씨가 나를 공격할 것 같은가? 글쎄, 아니.

내가 반격할 수 있는가? 예스.

주변은 밝고 제 3자가 있는가? 예스.

제 3자들은 안 도와주고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어휴, 나라도 도와야겠다.


"아저씨~ 이름 뭐예요"
"ㅊ..첤수.."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정신~!"
"으어ㅓ..."
"어디 가셔야 하세요"
"느옼...놐번..동"


"핸드폰 어딨어요~"
"여으어....ㄱ"
(툭)
"아저씨~ 누구한테 전화할까요"
"ㅇ..으ㅏ내"


이 분 큰일 나겠다 싶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손쉽게 핸드폰을 내어주다니. 이러니 아리랑치기 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아저씨의 핸드폰을 받아 전화번호부를 찾았다. '아'를 찾아가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쳐 지나간 저장된 글자들, '병원 예약한 곳', '경찰 연락하기', '가구업체 사장'... 사람이 아닌 스케줄로 가득한 전화번호부였다.


"여보세요~"
"어 여보"
"아, 안녕하세요 철수 선생님 아내분이신가요?"
"아, 예 예"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아 택시 예약해드릴게요"
"아휴 감사합니다"


아내분께 전화를 걸어 택시 번호와 위치 주소를 전해드렸다. 대로변 근처라 그런지 예약한 택시는 곧장 나타났다. 아저씨 보내고 집에 가면 되겠다 싶었다.


"기사님, 아저씨가 좀 취하셨는데 아내분께는 연락드렸고요~"
"술 취한 사람 안 받아요!"


기사님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액셀을 밟으셨다. 당황했지만 기사님의 거절에 그러려니 했다.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나는 모를 기사님의 안 좋은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두기로 했다. 선행을 가로막는 건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들 때문이니까.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 택시 타는 게 어려울 것 같아서요~ 직접 와주실 수 있나요?"
"네 그리로 갈게요"


그렇게 나와 철수 아저씨는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도로 연석에 걸터앉아 멍하니 있었다. 내분은 언제 오시려나 멍하니 있었다. 철수 아저씨를 빨리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하겠다 싶어 멍하니 있었다. 철수 아저씨는 비틀거리는 시선으로 웅얼거렸다.


"서... 집에 혼주ㅏ서 갈 수 있는데.."
"힘들다... 아가씨, 세상 살면 힘든 일이 많아ㅛ.."


철수 아저씨

뭘 그렇게 혼자서 가득 짊어지려 하셨던 걸까?


"쉐상에 '배.은망덕'이란 말이 있요.. 내가 햌코지했으면 어쩌려ㅕ고.."

"약에 와이푸...가 내가 아가씨랑 술 마셨냫하면 어려고.."


철수 아저씨

얼마나 그렇게 사람에게 데었던 걸까.


문득 아차 싶었긴 했다. 나의 선행이 불륜으로 오해될 수 있는 게 가능한 거였구나.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더욱더 무심한 척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럽게 텅 빈 말을 건넸다. 철수 아저씨는 내가 너무 고맙던지 나와 가까이 앉으려는 게, 온 몸으로 휘청거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멀리 앉았다. 나의 경계심을 느낀 철수 아저씨는 자세를 고쳐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배은망덕이라. 나도 배은망덕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야자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텅 빈 대로변에 한 아저씨가 차로에 길 가에 주저앉아 머리에 흐르는 피를 쥐어 잡고 있었다.
뭐라도 닦을 것을 내어드려야겠다 싶어 안경닦이 수건을 내밀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본 게 처음이라 놀란 마음에 어떻게든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저씨는 프랑스로 유학을 간 딸내미가 보고 싶다며 본인의 힘든 가정사를 울분을 토하며 털어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내 보조가방을 뺏어 차로변으로 집어던졌다.

아직도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책가방보다 더 큰 보조가방이었다. 뺏기도 던지기도 힘들 정도의 무거운 가방이었는데, 아저씨가 쏘아 올린 원심력과 구심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싸구려 가방의 지퍼는 터져 가방 속 물건들이 도로에 나뒹굴었다. 내 책과 노트들은 마치 타로카드를 펼치듯 촤라락 공개되었고, 텀블러는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처음 본 바깥세상에 염치없이 굴러다녔다.

그 뒤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어찌어찌 차도 위에 흩뿌려진 내 물건들을 수습했고, 안경수건과 고맙다는 인사는 그 남자에게 버려버렸다. 심장은 놀랬지만 정신은 이성적인 채로 집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엄마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눈물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다.
이런 배은망덕의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철수 아저씨를 도와드렸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안전했고 조금 더 강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때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철수 아저씨를 도왔나 보다.

드디어 아내분이 도착했다.


"아휴 감사합니다, 이를 어째..."

"으ㅓ니, 나 훤자 갈ㄹ 쑤 있뜨ㅏ니까"

"아니 아주머니 일단 아저씨부터 붙잡아요"

정신없는 철수 아저씨, 고마움에 날 붙잡으려는 아주머니, 머리통 깨질까 조마조마한 나까지 셋이서 얽혀있었다.


"궈맙습니다, 은휴ㅔ를 갚야... 연락춰 빨리 달ㄹ라고 구뢔"

"(지갑을 뒤적이며)어휴 고마워요, 이거라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사례를 받나 싶어 냅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부리나케 나를 잡으러 오는 아내분. 소의 나였다면 칼같이 끊어내려 했을 것이다. 마음을 주는 것에 익숙하고 받는 것이 힘들었던 나였다. 멈칫 고민을 했다. 에게 보답을 해야 하는 미션이 생긴 아내분과 밤중에 추격전을 하는 건 아닌듯하여 도망치려던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했다.

최근 들은 인상 깊은 문장이 있다. '받는 것도 잘 받아야 한다.' 마음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아내분의 사례를 기다렸다.

리 도망가고 싶은데, 처음 보는 사람인데 뭘 이렇게 뒤적이시는 걸까. 아내분의 지갑 속에서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지폐가 힐긋 보였다. 한참을 뒤적이시더니 오만 원을 쥐어주셨다.


"고마워요"



- 2020. 7.14. 치르치르 앞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걱정해주니까 걱정이 되더라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