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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공개 Feb 11. 2021

햇빛 알레르기의 첫 해외여행

햇빛 알레르기면 어때?

나의 첫 해외여행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간 일본 후쿠오카였다. 첫 출국이라는 기대, 햇빛은 어쩌나 걱정, 친구들과 함께라는 설렘으로 1주일 전부터 짐을 일찌감치 다 준비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모자, 카디건, 레깅스, 양산, 알레르기용 바르는 약까지. 어찌나 고대했던지 여행 당일 새벽 5시에 맞춰둔 알람시계보다도 일찍 일어났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까멜리아호는 말괄량이 여고생들을 태우고 밤새도록 밤바다를 달려 일본으로 향했다.

하늘도 무심하지, 수학여행 내내 햇빛이 쨍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맑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고통스러운 날들 중 하루는 나룻배에 앉아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도시락(벤또)를 먹는 일정이 있었다.

화창한 날씨, 조용한 마을, 주변은 노를 젓는 뱃사공의 나직한 목소리와 잘박거리는 물소리로 고요했다. 나무로 만든 나룻배가 삐그덕 삐그덕 소곤거렸고, 핑크빛 체리가 얹어진 탐스러운 도시락을 받아 무릎 위에 두었다. 참으로 일본스러운 나른한 풍경이었다.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점심 먹기 사투를 시작했다. 한 손으론 보랏빛 양산을 들고 한 손으론 젓가락을 집었다. 무릎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나룻배 위에 균형을 잡고 밥을 먹으려니 영 불안하다. 고민하다가 오른쪽 어깨에 양산을 끼고 왼손으로 도시락을 잡았다. 몇 숟갈 먹었나, 오른쪽 어깨가 결린다. 왼쪽 어깨로 양산을 옮겨 몇 숟갈 먹는다. 그랬더니 왼쪽 어깨가 결린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기려다 결국 처음처럼 한 손으로 양산을 들고 무릎 위의 도시락 반찬을 조심스럽게 집어먹었다. 도라에몽의 프로펠러처럼 양산을 머리에 꼽을 수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 텐데. 이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양어깨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보라색이 좋아서 산 보랏빛 양산 밑에서 먹으려니 밥알도 보래졌다. 탱글탱글한 계란말이는 노오란 빛을 잃었다. 보랏빛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설상가상 햇빛은 쉬지 않고 내리쬈다. 양산 아래로 햇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속으로 애가 탔다. 이거 언제 끝나나. 친구들은 이 순간이 행복한지 웃고들 있어서 그 행복을 깨트리면 안 되겠지 싶었다. 입으로는 웃었지만 빨리 내리고 싶었다. 나룻배가 뭍에 닿자마자 후다닥 버스로 도망쳤다. 고역스러운 점심 먹기였지만, 힘들었던 기억은 이것만 남아있다. 수학여행 동안에 땡볕에서 화산 분출구도 보고, 테마파크도 가고, 성곽도 돌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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