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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크롬 Apr 28. 2020

인싸 아싸 논란에 대한 내 생각

아싸 브이로그?

  1. 요새 '아싸 브이로그'를 필두로 인싸 vs 아싸 대결 구도가 인터넷에서 핫하다. 핵심은 이렇다. 화려한 비주얼에 인간관계가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인싸'가 스스로를 '아싸'라고 칭하며 실제 '아싸'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담론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어느 정도 인지되고 있는 분위기였으나, 비난의 화살이 일반인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브이로그로 향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는 결국 대학생들이 영상들을 삭제하거나 사과문을 게재하는 결말로 이어졌다.



  2. 그렇다면 인싸와 아싸 사이의 갈등은 그저 해프닝일까? 아싸들의 비난은 유효한가?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스스로를 '진짜 아싸'라고 부르는 이들은 말한다. 금수저들이 용돈으로 창업을 하고, 자신들의 성공에 있어서 노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인싸들이 우리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한 마디로 '빼앗긴 가난'에 이은 '빼앗긴 아싸' 담론이다. 부분적으로는 이해가 간다. 아싸는 그들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주어진 삶에 행복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싸는 분명 더 많은 친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대학 생활을 원할 것이다.



  3. 하지만 도대체 아싸는 인싸의 무엇을 선망하고 있는가? 나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인싸의 성격과 외모, 그리고 나머지는 넓은 인간관계이다. 이렇게 분류하면 아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수가 있다.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싸의 삶을 버리고 인싸의 인간관계를 택하겠는가?"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yes를 대답할 수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관계란 돈과 다르다. 즉,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는 것과 단순히 친구가 적은 이들에게 많은 친구를 '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넓은 인간관계는 많은 시간 투자와 돈, 적극적인 대화가 있어야 지속될 수 있다. 가령 인싸들은 동아리, 학회, 대외활동을 비롯한 많은 집단에 이름을 두고 각종 술자리와 모임에 끊임없이 참석한다. 따라서 홀로인 생활을 영위하던 아싸가 하루아침에 인싸가 된다 한들 마음이 편할까? 글쎄. 전반적으로 내향성을 띤 아싸의 성향을 고려해서 난 아니라고 본다. 인싸의 생활은 많은 품이 들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무엇이다.



  4. 결국 핵심은 이러한 인간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외향적인 성격, 그리고 이에 동력을 더해주는 매력적인 외모로 귀결된다. 이것이 바로 인싸가 가진 진짜 재산이다. 문제는 이것이 돈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싸 생활과 가난과의 유비가 부적절하다고 본다. 그보다 인싸들의 브이로그는 공부 잘하는 친구가 시험이 끝나고 울면서 "나 한 개 틀렸어 ㅠㅠ"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정말 재수 없긴 하지만 그것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친 비난을 견뎌내야 하는지는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오히려 위와 같은 사례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덤덤한 편이다.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대단하다든지, 저런 애들은 아예 다른 세상에 사니까 나와 관련 없겠지, 라고 말하는 식이다. 더 나아가 교수나 영재들이 "이걸 몰라?"라고 말할 때 정말로 자신이 지적 수치심을 느끼는지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진지하게, 철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존 롤스의 방식으로 타고난 재능 또한 정의의 대상이라고 가정하면서, 아싸가 인싸에게 (최소 수혜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의무적인 겸손을 요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 인간적 삶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력과 외모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잘생긴 놈들에게 세금을!) 매력과 외모를 객관화할 수 없는 이상 비현실적이고 우스운 질문이다. 인싸가 아싸에게 직접 차별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인싸가 스스로를 아싸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도의적 문제로 보인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싸 아싸 문제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태도이다.



  5. 정리하면, '아싸 브이로그' 사건은 지나치게 과열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열등감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모습만 언뜻 비쳤을 뿐이다. 전 에세이에서도 언급했지만, 미디어와 SNS가 발전함에 따라 비주얼적인 부분과 누려야 할 삶의 기준이 너무 높아졌다. 물론 세련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화려함에 길들여져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삶의 기준점을 잃어버리는 건 좋지 않다. 인싸와 아싸의 차이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삶일 뿐이다. 또한 인싸가 무조건적으로 행복하다는 근거도 없다. 심지어 인싸와 아싸가 정확히 정의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활동적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친구의 수와 관계없이 자신을 인싸라기보다 아싸라고 소개하며, 두 단어는 그저 편의와 겸손을 위한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예쁘고 잘생긴 이들이 잘난 척을 해도 쿨하게 무시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P.S.) "나는 아싸인데, 인싸의 삶을 원하는 건 아니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인싸가 놀린 것 자체에 화가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났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대한 불만족을 함축하며, 결국 아싸의 삶에서 개선된 삶, 인싸의 삶의 속성을 어느 정도는 원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 모순이다(인싸와 아싸를 속성을 공유하고 정도만 다른 관계로 정의한다면). 그리고 "자발적인 아싸도 있다."는 반박도 마찬가지다. 자발적 아싸라는 건 열등감이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 아싸와 인싸의 삶은 행복도에서 어떤 구분도 할 수가 없고, 비교선상에 놓기 어려운 독립적인 삶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발적 아싸는 인싸의 브이로그를 보고서 "아싸는 이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라고 비난 없이 사실적시만 할 것이다. 자발적 아싸가 기분이 나쁘다면 기만이 아니라 인싸가 사실과 다르게 말했다는 포인트에서 그렇게 느낀 것이고, '빼앗긴 아싸'와 같이 열등감을 동반하는 결론과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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