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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크롬 Apr 30. 2020

문과 버전 폰 노이만의 삶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리뷰

  1. 영국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이하 밀)이란 사람에 대해서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그의 발자취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을 좋아한다면 그를 <자유론>의 저자로 기억할 것이고, 경제를 전공했다면 그를 초창기 경제학을 이끈 정치경제학자로 기억할 것이며,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벤담으로부터 이어지는 공리주의자로 기억할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 근대사의 진보를 이끈 사회주의자이자 리버럴 페미니스트였다. 밀은 동시대 사상가인 마르크스처럼 세상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위처럼 다양한 분야에 골고루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보다 꾸준한 저술과 더불어 말년까지 정치 활동에 참여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2. <자서전>에서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버지 제임스 밀 슬하에서 이루어진 천재교육이다. 그렇다. 밀은 천재였다. 비유하자면 문과 버전 폰 노이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그는 학교를 아예 다니지 않고(초졸 미만) 아버지 밑에서 고전 공부와 질의응답으로 빡센(?) 조기 교육을 받았다. 밀은 3살 때 그리스어 교육을, 8살 때 라틴어와 수학 교육을 받았으며 12살까지 논리학을 배웠다. 이때까지 30살 정도는 되어야 배우는 지식을 습득한 것이다. 15살 때는 경제학·역사학·철학·자연과학을 공부했고, 16살에는 공리주의협회를 지도했으며 다음 해에 동인도회사에 입사한다. 즉, 중학생 때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고등학생 때 삼성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 다만 밀은 유년 시절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감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엄격한 아버지 탓에 자신이 받았던 교육에 결점이 아예 없었다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3. 밀이 위와 같이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재능뿐만 아니라 환경도 한몫했다. 일단 아버지인 제임스 밀 또한 당시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고 그의 친구는 공리주의 사상의 틀을 마련한 제레미 벤담이었다. 태어났는데 아버지와 그 절친이 권위 있는 대학교수였던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밀은 데이비드 리카도, 토마스 칼라일, 오귀스트 콩트 동시대의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했다. 유럽 19세기가 얼마나 지적 황금기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밖에도 밀은 <웨스트민스터 리뷰>와 같은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토론회를 운영하는 등 꾸준히 지적 능력을 갈고닦았다. 집안의 빵빵한 지원, 훌륭한 인적 환경, 재능 3박자가 딱 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하지만 밀에게도 정신적인 위기가 한 번 있었다. 스무 살이 된 해에 갑자기 만사에 흥미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시를 통해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사상적으로 한 단계 도야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온건한 형태의 공리주의를 확립하게 된다. 또한 밀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온다. 유부녀인 해리엣 테일러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밀은 무려 18년이나 교제를 이어가다가 그녀의 남편이 죽자 바로 결혼한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로 보았을 때,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난 흠집이 아닐까 싶다. 밀은 해리엣이 자신의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한다(사랑의 힘이 이렇게나 크다). 심지어 <자유론>, <여성의 예속>, <경제학 원리>와 같은 밀의 대표 저서에도 그녀의 영향력이 녹아 있다고까지 말한다. 물론 그녀가 얼만큼의 지분을 갖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밀의 순애보가 아주 컸다는 사실만 이해하면 충분할 듯하다.




  5. 이처럼 밀이 독특한 인생을 살아온 탓에 <자서전>의 뼈대 자체는 흥미롭다. 하지만 <자서전>은 밀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언급하는 철학적 디테일(사상가, 저서)이 많고, 영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불가피한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밀이 많은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한 만큼, 독자에게 철학과 경제에 대한 얕은 관심 정도는 필요하다. 한편, 나는 밀이 가끔씩 짚고 넘어가는 삶에 대한 통찰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바로 논리학의 중요성, 생계와 하고 싶은 일과의 관계, 지나친 분석에 대한 조심 등이다. 스토리텔링과 현실적인 교훈,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자서전의 최고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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