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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크롬 Jul 16. 2019

수학을 배워서 다행이다

수학과 졸업반의 고백

  솔직히 나는 수학이 뭔지도 모르고 대학에 들어왔다. 스무 살의 나는 힙합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지배되어 있었고, 수학을 배워서 먹고산다는 건 단지 플랜 B일 뿐이었다. 인생이 꼬이다 못해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면 사교육계에서 선생 노릇을 하려고 했다. 여튼,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학은 그저 수능을 위해 공부했던 것들 중 내가 우연히 가장 잘했던 과목에 불과했다. 물론 아무나 잘 할 순 없었기에,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아마도 '진짜' 대학 수학을 맛본 적이 없는, 특목고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논술 준비를 해 본 적이 없는 수학과 친구들은 2학년이 되고 나서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교과서와 칠판에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우리들의 이해를 도왔던 그래프마저 '휴리스틱'으로 간주되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별생각 없이 취했던 극한과 연속은 앱실론과 델타라는 기묘한 개념 아래 있었으며, 당연하게 사용하던 덧셈, 곱셈과 같은 연산들과 수 체계를 바닥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졸업까지 남은 3년은 사실상 '증명'의 연속이다. 수능 문제 21, 30번을 거뜬하게 풀던 친구들도 '왜' 그런지 줄글로 설명하라는 질문에 그저 난감해할 뿐이다.


  안 그래도 흥청망청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던 나에게 위와 같은 상황은 공부를 더 격렬히 포기하게 만들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2학년 1학기에는 전체 석차가 뒤에서 2, 3등을 다투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학교를 도망쳐 나와 나는 휴학생이 되었고, 군생활 포함 3년을 수학과 동떨어져 보냈다. 만약 일반적인 진로를 고민했다면 복학 후를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교과서를 펼쳐보았을 테지만, 내 관심은 여전히 음악 쪽에 있었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3년 동안 나는 글쓰기와 외적인 소양 쌓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웬걸, 독서를 통해 속물근성을 털어낸 나는 지적 자존심이라는 새로운 가치관과 마주했다. 공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변신했으며 학점만을 위해 학교 수업을 듣는 건 나에게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고등학생 수준의 머리를 가진 이 복학생은 기초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온갖 복잡한 개념들과 정직한 씨름을 시작해야 했다. 남들이 1시간 걸려서 이해할 내용을 하루 전체를 투자해야 겨우 알아들을까 말까 했지만 무작정 외우고 넘어가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전체 그림을 파악하는 요령도 없었다. 성적? 당연히 좋지 않았다.


  이 경향은 3학년 1학기까지 비슷하게 이어졌다. 나는 언제나 기초적인 부분에서 허덕였다. 우습게도 내가 나아지면 과목은 더 어려워졌기에 현상 유지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2학기가 되면서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심화과목이 개설되고 난이도가 더욱 상승하자 수강생들이 열명 안팎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유는 부전공을 신청하거나, 학점을 쉽게 노릴 수 있는 과목으로 빠지는 등 현실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나는 과 사람들과 진로가 달랐고, 학점관리가 필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과목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커져버린 지적 호기심도 거기에 한몫했다.


  4학년쯤 되자 나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대학원 준비생들이나 들을 법한 과목까지 수강신청에서 골라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수학으로 대학원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내가 고급 과목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남들이 이해 없이 암기하거나,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것들에 겁을 먹지 않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의 훈련이 되었고, 공부 자체에 있어 자신감도 부여해 주었다.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도 수학을 할 때보다 최악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학, 철학, 외국어만 있으면 예체능을 제외하곤 세상 어떤 것이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결국 난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수학을 재발견한 셈이다. 과거에 도구적인 역할만을 했던 수학은 지금 내 사상의 중요한 뼈대가 되었다. 아마 졸업 후에 나는 학부 시절 배운 내용을 대부분 잊어버릴 테지만 다른 진로로 가는 이상 그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수학을 통해 논리적, 통계적 사고력을 얻었고 천재들의 창의력과 통찰력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적인 발전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전공이 수학인 사실에 늘 감사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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